본문 바로가기
■아프리카******국가들/⊙이집트*****기행

이집트ㅡ투탄카멘(Tutankhamen)ㅡ병약 했던 소년왕....무덤서 10㎏짜리 황금 가면 발견.

by 삼수갑산 2022. 10. 26.

투탄카멘 (Tutankhamen)

병약 했던 소년왕....무덤서 10㎏짜리 황금 가면 발견.

▲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장례용 황금 가면. 투탕카멘의 머리를 보호하려고 미라에 씌워져 있었어요. /위키피디아

 

올해는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Pharaoh· 최고 통치자) 투탕카멘(재위 기원전 1333 ~기원전 1323년 추정)의 무덤이 발견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채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굴됐고, 그로 인해 무덤에서는 유물 수천 점이 발견됐는데요.

 

그래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두고 '20세기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사실 투탕카멘은 왕으로서 업적보다 무덤과 부장품 덕분에 이름이 알려졌는데요. 투탕카멘의 무덤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요?

◈9세에 즉위해 업적 없이 요절해

이집트 제18왕조(기원전 1570~기원전 1293년)의 12대 파라오인 투탕카멘은 생전에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던 지배자는 아니었어요. 재위 기간이 짧아 업적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죠.


그는 선왕인 아케나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9세에 즉위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오늘날에도 투탕카멘을 '소년 왕'이라고 부른답니다. 당시 대재상이었던 아이(Ay)와 장군 호렘헤브(Horemheb)가 투탕카멘의 고문 역할을 하며 이집트의 실권을 장악했죠.

투탕카멘은 이집트 왕실의 근친혼에서 비롯된 유전병으로 인해 병약했을 것이라고 추측돼요. 투탕카멘의 부인이었던 안케세나멘 역시 그와 이복 남매였는데, 이 때문인지 그의 두 딸도 사산됐거나 몸이 약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두 딸의 시신도 투탕카멘과 함께 무덤에 묻혔다가 발굴됐죠.

결국 투탕카멘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19세 무렵에 사망했는데요. 정확한 사인은 알려져 있지 않아요. 그의 무덤에서는 지팡이가 약 130개 발견됐는데요.

 

이로 미루어 봤을 때 투탕카멘은 생전에 관절이 좋지 않았고 거동이 불편했을 것으로 추측돼요. 과학자들은 그의 사인(死因·죽게 된 원인)을 말라리아로 추측하기도 하는데, 투탕카멘의 미라에서 말라리아 기생충의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지요.

투탕카멘이 죽은 뒤에는 이집트 실권을 쥐고 있던 아이와 호렘헤브가 연달아 왕위에 오르는데요. 호렘헤브는 여러 기념물과 기록에서 투탕카멘의 이름을 지웠습니다. 투탕카멘의 무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데에 일조한 거예요.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발견

잠들어 있던 투탕카멘의 무덤은 영국 출신 하워드 카터(1874~1939)가 발견했습니다. 그는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고고학 기초 지식을 배운 다음 17세인 1891년 이집트로 향하는데요.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벽화 등을 옮겨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다가 1902년 파라오의 무덤이 모여 있는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서 발굴 작업을 시작했어요.

왕가의 계곡은 이집트 나일강 중류 룩소르의 서쪽 교외에 있는 좁고 긴 골짜기인데요. 왕릉이 집중적으로 발견돼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됐답니다. 왕가의 계곡에 있는 파라오들의 묘는 눈에 잘 띄는 피라미드 형태가 아닌 바위나 산 속에 방을 만드는 형식의 '암굴 묘'였어요.

 

왕실의 부장품이 도굴되는 것을 방지하려 이렇게 만든 것으로 추측됩니다. 카터는 이곳에서 제18왕조의 2대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1세와 제18왕조의 8대 파라오인 투트모세 4세 등의 무덤을 발견하지요.

그러다 카터는 1922년 영국 부호인 카나번 경(卿)의 후원으로 투탕카멘의 묘지 입구를 찾아냅니다. 카터는 처음 투탕카멘의 무덤을 마주했던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온 사방이 황금빛으로 반짝였습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이 무덤에서 카터는 엄청난 양의 제사용 도구와 장신구, 조각상, 가구 등을 발견했어요. 그의 발굴은 영국의 이집트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투탕카멘은 다른 신하를 위해 짓고 있던 무덤에 매장됐어요. 그래서 파라오의 무덤이지만 규모가 매우 작은 편이래요. 하지만 덕분에 오히려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죠. 왕가의 계곡에는 제18·19·20왕조의 거의 모든 왕이 묻혀 있는데요. 그중 투탕카멘 무덤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은 전부 도굴됐다고 합니다.

◈황금 가면과 운석으로 만든 단검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장례용으로 제작된 황금 가면입니다. 무덤의 보존을 위해 발굴 작업은 천천히 진행됐고, 1925년이 돼서야 3중으로 만들어진 투탕카멘의 관을 모두 열 수 있었는데요. 이때 황금 가면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무게는 약 10㎏이었고, 높이 약 54㎝, 너비 약 40㎝였어요.


이 가면은 투탕카멘의 머리를 보호하려 미라에 씌워져 있었는데요. 미라의 어깨를 덮은 깃 부분은 루비·흑요석 등 호화로운 재료로 꾸며져 있었어요. 이집트의 뛰어난 보석 세공 기술을 잘 보여줍니다.

투탕카멘 미라와 함께 매장됐던 단검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요.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녹이 슬지 않은 상태로 발견돼 주목받았어요. 조사 결과, 이 단검은 철이 아닌 운석을 녹여 만든 것이었죠. 1960년대 이전까지 이집트는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을 이집트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는데요. 이후 해외에 전시용으로 대여해 주기 시작했답니다.

[투탕카멘의 저주]

현재는 거의 믿는 사람이 없지만, 파라오 무덤 발굴 작업이 한창이던 시절 한때 "파라오의 무덤에 침입한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적이 있어요.

 

투탕카멘 무덤이 발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굴 작업을 후원했던 카나번 경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56세로 사망하고, 카이로 곳곳에서 전기가 나가는 사태가 일어나자 떠돌기 시작한 이야기인데요. 이 외에도 발굴 팀원이나 무덤 가이드가 급사해 저주설을 진짜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카터는 이런 저주설에 화를 내며 "바보 같은 소리"라고 일축했죠.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한 하워드 카터가 투탕카멘의 관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 /위키피디아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나무 상자. 투탕카멘의 이름 일부가 이집트 상형 문자로 새겨져 있다고 추정돼요.

/위키피디아

 

글.사진출처 / chosun.com / 윤서원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