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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아시아*****국가들/⊙요르단*****기행

요르단ㅡ암만(Amman)ㅡ성서시대의 라바트암몬과 일치하는 요르단 수도 암만

by 삼수갑산 2022. 8. 29.

암만(Amman)ㅡ성서시대의 라바트암몬과 일치하는 요르단 수도 암만

▲요르단 암만(Amman) 시내

 

구약성경에 의하면 암몬은 롯과 딸들의 잘못된 관계에서 태어난 족속으로 두 번째 딸의 아들인 벤암미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이다. 암몬은 랍바성을 중심으로 도읍을 정하고 북으로는 얍복강, 남으로는 아르논 강을 영토로 정하고 이스라엘과는 적대적인 위치에 있었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암몬이 살고 잇는 지역의 특징은 모압지역에 비해 강우량이 적으며 토지도 상대적으로 덜 비옥하고 수도인 랍바에서 10km 만 나아가면 사막이 있을 정도로 주변 환경이 좋지 못했으며 시막에 살고 잇는 유목민들의 침입을 자주 받는 지형적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암몬은 주변에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길르앗 산지로 영토를 확장하고자 자주 침입하였는데 이러한 암몬의 모습은 입다의 시대나 사울의 시대에 종종 등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암몬은 열악한 환경상 요단 동편 지역은 소국가중 가장 힘이 약한 나라였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 대항했던 소국인 암몬 왕국은 주전 8세기 말, 앗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당해 그 후 4백년이상 암몬과 수도 랍바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주전 3세기 희랍시대에 들어와서 암몬 지역과 수도인 랍바는 교통의 요지인 이 지역의 중요성을 간파한 헬라왕 프톨레미 2세 필라델피아에 의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엇고 이름도 자신의 이름을 따 헬라식 이름인 '필라델피아'로 바뀌게 된다.

 

다시 주전 63년에는 이스라엘 땅을 포함해서 이 지역전체는 로마제국의 통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 지역은 로마에 의해 데가볼리 중 하나로 다시 크게 융성하게 된다. 또한 주후 4세기초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비잔틴' 시대에 이곳에 기독교 전파와 함께 교회들이 건설되면서 주교가 있는 요단강 동편지역교회의 중심지가 되며 황금기를 누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AD 630년대, 당시 신흥종교인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랍인들이 이 지역을 정복했고, 그때부터 이 도시의 이름도 '암만'으로 바뀌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요르단강 동쪽 75km 지점, 아라비아 고원의 서쪽 끝 높이 약 800m의 대지에 자리잡고 있다. 암만은 BC 5세기경부터 있었던 옛 도시로, 성서의 라바트암몬과 일치하나,유적으로는 몇 개의 분묘만이 발굴되었을 뿐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 2세가 도시를 재건했고, 그 후 로마 ·비잔틴 시대에는 필라델피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으며, 특히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과 헤라클레스 신전 및해안에 있는 님프의 폐허가 유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아밀 압둘라가 이곳에정부를 수립하고 수도로 정했으며, 팔레스타인 전쟁 때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세력의 중심지로 아랍 군단이 주둔하기도 했다.

 

▲The modern town and mosque.

Ancient Rabbath Ammon or Philadelphia. Amman, Jordan. 1898-1946

 

요르단 암만. 로마시대 원형극장 유적. 

 

요르단 암만. 로마시대 원형극장 유적. 

 

요르단 암만. 랍바성터 유적. 

 

요르단 암만. 랍바성터  

 

▲암만 랍바 성터 유적

 

▲암만 랍바 성터 유적

 

▲암만 랍바 성터 유적

 

▲암만 랍바 성터 유적

 

암몬과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구약시대의 사건으로는 다윗과 우리야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야를 랍바성 전투의 최선두에 서게 하였고 치열한 성벽전투에서 우리야만을 앞세우고 다른 군사들은 뒤로 후퇴하여 결과적으로 우리야가 성안의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어 죽게하는 작전을 폈던 것이다.

 

이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잇는 랍바성이다.  암만에 남아 있는 랍바성의 흔적은 '알 칼라'(Al-Qala)산 정상부분 에 있는 성채에서 고스란히 남아있다. 해발 850m로 암만의 중심부에서 제일 높은 이 산의 정상 부분에는 4천∼5천년전부터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구약시대의 다윗이 빼앗았던 성읍인 랍바성의 일부이며 오늘날 대도시가 된 암만도 이 성채를 중심으로 확장되었다 할 수 있다.

 

성채구역 안에는 고대의 성벽, 로마시대에 건축한 웅대한 '헤라클레스' 신전, 비잔틴 시대의 교회 터, 이슬람 시대의 왕궁 등 귀중한 유적들이 많이 있어 오늘도 활발한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암만 랍바 성터 유적

 

고대 암몬의 수도인 랍바(Rabbah)는 오늘날 요르단 수도인 암만이다. 요단강에서는 동쪽으로 약35㎞ 지점의 요르단 고원지대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대 랍바성은 오늘날 암만 중심지에서 약간 벗어난 산 언덕에 위치에 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버스터미널 근처의 호텔에 묵고 있던 나는 고대 랍바성을 가기 위해 비교적 시간을 여유있게 갖고 출발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암만 시내에 있고 오전 9시에 문을 열기 때문에 일찍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숙소를 출발한지 20여분만에 랍바성에 도착했다. 랍바는 왕성과 물들의 성(삼하12:26∼27)으로 불리며 완전한 이름은 암몬 족속의 랍바이고, 랍바는 그 단축형이다. 이 도시의 이름은 헬레니즘 시대에 톨레미 필라델푸스(Ptolemy Philadelphus, BC285∼246)에 의해 재건된 후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불리게 되었으며 후에는 이 명칭이 사라지고 암만이라 불리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랍바성 등성의 산 언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지금도 돌로 쌓은 웅장한 성벽의 모습이 남아있어 이곳에서 다윗에 의해 죽임을 당한 우리아를 생각나게 했다. 그 옛날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후 남편인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요압 장군에게 밀지를 내려 싸움이 격렬할 때 우리아로 하여금 이곳 성을 선두에 서서 공격하게 한 후 군사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여 돌에 맞아 죽도록 했다

 

그런 랍바 성채에 오르자 사방으로 암만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특히 로마 때 건설된 야외극장이 멀리 분명하게 시야에 들어왔고 왜 이 높은 곳에 성을 쌓았는지 이유를 알만했다. BC21세기 초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랍바는 우리아가 죽은 이후 요압에 의해 함락되어이곳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역군 사역자가 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은 후에는 이스라엘로부터 독립을 쟁취해 트랜스 요르단 지역의 북이스라엘을 압박했다 선지자들은 암몬인들에게 분개하여 랍바의 파멸을 예언하였다

 

이후 랍바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는 앗수르의 지배를 받았고 계속해서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현재 랍바(암만)에는 중세와 비잔틴 시대, 로마, 헬라 도시들의 유물들이 있다.

 

이곳에서 남쪽에 위치해 있는 암만 공항 근처에서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성소가 발굴되어 무기, 인장, 갑충석, 보석과 도기들이 출토되었으며, 암만 시내에서는 철기시대의 분묘와 소장품들이 발굴되었다. 고대 도시 성곽에는 로마 시대의 유적이 가장 많이 나왔는데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성읍 정상에는 암몬의 국가신인 밀곰을 숭배했던 신전 기둥이 높이 솟은 채 남아있었다. 밀곰은 왕, 왕자라는 뜻으로 이 신에 대한 희생 제물로 인간이 드려졌다 이스라엘은 신앙이 타락했을 때 힌놈 골짜기에서 유아들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가증한 일을 행했는데 이는 암몬의 밀곰신의 영양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솔로몬은 지혜의 임금이었지만 그는 말년에 밀곰 신전을 감람산 위에 지었으며, 요시야는 그 신전을 헐어버렸다 밀곰 신전 옆 약간 아래에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터가 있고 왕을 접견했던 알현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밀곰 숭배처 가까이에 교회터가 있는 것은 이후 비잔틴 때 이곳에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곳 뿐만 아니라 비교적 오래된 역사를 가진 성읍에는 신전터와 교회터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지금 요르단은 회교 국가가 되어 랍바성에서 바라본 암만 시내에는 여기저기 회교 사원이 세워져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 나라에도 회교 사원 탑 대신에 교회의 십자가 탑이 세워지길 기원하며 성을 내려왔다 

 

▲암만 랍바 성터 유적

 

▲암만 랍바 성터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