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동 아시아*****국가들/⊙오만*******기행

오만ㅡ바트(Bat)ㅡ알쿠틈, 알아윈 고고 유적지

by 삼수갑산 2021. 10. 9.

오만(Oman)ㅡ바트, 알쿠틈, 알아윈 고고 유적지

아라비아반도 남동부에 있는 나라로 인도양과 페르시아만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입지한다.

일찍이 진출하여 150여 년간 지배해온 포르투갈인(人)을 1650년 추방하였다.

1891년 영국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의존이 높아져 사실상 피보호국이 되었고,

1951년 영국과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완전 독립국이 되었다.

 

바트・알쿠틈・알아윈 고고 유적은 오만의 알다히라(Al Dhahira) 지역에 위치하며, 바트(Bat)의 선사시대 유적지는 오만 왕국 영토 내 야자수 숲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유적지는 인근의 다른 유적지와 함께 기원전 제3천년기(第三千年期; 기원전 3000년~기원전 2001년)에 형성된 촌락과 공동묘지들이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촌락과 공동묘지에 걸쳐 있는 바트 유적지는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또한 가장 잘 알려진

기원전 제3천년기의 유적지이다.

 

일정 공간 안에 모여 있는 바트의 공동묘지는 오만 반도에서 초기 청동기시대를 지나는 동안 장례 관습의 변천사를 보여 주는 독특하면서 유일한 증거이다. 사료에 따르면 마간(Magan)이라는 나라는 구리 산지로서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멀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구리를 수출했다고 한다.

 

위계 질서가 엄격한 사회 조직의 출현으로[원형의 방어용 구조물이 정사각형 가옥 구조와 대비되는 주거 지역, 매장 공간의 배치가 더욱 복잡해진 공동묘지 등을 통해 증명됨] 생활수준이 이전보다 높아졌고, 교역 경제와 연계되어 사회적인 변화가 초래되었다.

 

1972년 시작된 발굴 조사의 결과, 원시시대의 유적지가 바트의 촌락과 야자수 숲 북쪽으로 뻗어 있음이밝혀졌는데 그 유적지에는 기원전 제3천년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촌락과 공동묘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작은 물길이 합류하는 지점과 알히즈르 와디(Wadi al Hijr) 북쪽에 있는 정착지 구역에는오만 반도의 초기 청동기 시대를 단적으로 대표하는 5기의 돌 ‘탑’이 있다.

 

이 중 하나의 탑에 대한 발굴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되어 이 탑이 기원전 2595~기원전 2465년에 세워졌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부 구조를 살펴보면 일련의 밖으로 뻗은 부분이 있고, 돌로 지은 거대한 토대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여러 개의 방이 일렬로 있으며, 중앙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는 점에서 탑의 도면이 매우 특징적이다.

 

이 유적지의 기준점 역할을 하는 탑을 기점으로 해서 동쪽 경사지에는 가운데뜰을 둔 사각형 가옥이 자리를 잡았고, 북쪽에는 거대한 규모의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 묘지는 바위투성이의 능선 맨 위에 있는 것과 와디(wadi;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간헐 하천) 남동쪽의 계단식 경작지 위에 있는 두 그룹으로 나뉜다.

 

전자에 속하는 자연석 돌무덤은 바트에서 알와라(Al Wahrah)로 뻗은 길을 따라 산재한다. 이 중 어떤 것은 조성된 직후 변경된 듯하지만 어쨌든 기원전 제4천년기로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후자의 묘지에는 전자에 비해 무덤들이 훨씬 더 촘촘하게 밀집해 있다. 가공하지 않은 판판한 자연석을 벌집 모양으로 쌓아 만든 100기 이상의 무덤이 마치 도면에 따른 듯 배열되어 있다.

 

출입구와 묘실이 단 1개씩으로 소수의 사자(死者)를 매장한 가장 오래된 무덤들이 북쪽에 있고, 남쪽으로향할수록 점점 거창해져서 2개의 출입구가 2개부터 많게는 4개의 묘실로 향하는 더 많은 수의 고인을 위한 구조로 된 무덤들이 있다.

 

바트의 촌락과 공동묘지 구역은 동시대에 속하는 인근 2곳의 고고 유적지, 즉 바트에서 서쪽으로 2㎞ 떨어진 알쿠틈의 탑, 그리고 남동쪽으로 22㎞ 떨어진 곳에 있는 알아인의 쿠부르주알(Qubur Juhhal)에서 발견된 일단의 벌집형 묘와 일관성이 있으며, 또한 이 모든 것을 대표하는 곳이다.

 

멀리 북쪽으로 미쉬트(Misht) 산의 멋진 풍경이 보이는 바위투성이의 산마루 위에 줄지어 있는 기원전 제3천년기의 묘 21기는 놀랍도록 보존이 잘된 상태이다. 이들 묘는 아직 발굴 작업을 마치지 않았지만 흥미로운 고고학의 저장고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