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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아시아*****국가들/⊙시리아*****기행

시리아ㅡ클락데 셔벌리에(Crac des chevaliers)ㅡ살라딘도 공략하다 실패하였다는 난공불락의 십자군 기사의 성채

by 삼수갑산 2022. 8. 17.

클락데 셔벌리에(Crac des chevaliers)

살라딘도 공략하다 실패하였다는 난공불락의 십자군 기사의 성채

▲클락 데 셔벌리에 십자군 성채 

 

외성과 내성 사이에 물 채운 이중 구조 십자군 50개 성채 중 유일하게 원형 보존13C 이슬람교도가 가짜 밀서(密書) 이용 함락시켜서기 1099년 유럽 기독교 국가들로 구성된 십자군은 예루살렘 입성에 성공했다. 기독교 성지를 이슬람교도의 손에서 탈환하자는 구호 밑에 시작된 십자군전쟁의 승리였다. 이로써 200년간 계속된 십자군시대가 열렸다.


1996년 유럽을 출발한 십자군의 대장정은 오늘날 터키의 최남단 도시 안디옥(현재의 안타키아)을 점령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남진(南進)을 계속해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십자군은 북의 안디옥에서 남의 예루살렘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십자군은 남북으로 700km나 되는 이 지역에 50개가 넘는 요새 성채를 축성하였다. 이 성채들은 십자군 건축양식에 따라 하나같이 규모가 웅대했지만 13세기 말 십자군의 패배와 함께 파괴되었다. 그 후 70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본래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오직 웅장한 골격들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단 한 곳의 예외가 있다. 십자군시대 성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된 곳이다. 그곳은 시리아의 크락 데 셔벌리엘(Crac des Chevaliers)이라고 부르는 성채다. “기사(騎士)의 성채”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당시 성채의 구조와 축성법 연구에 교과서가 되고 있다.


또 유럽 전체를 포함해서 중세 건축물 가운데 건축법이나 건축미가 매우 뛰어난 것 중 하나로 꼽혀 건축사 연구에도 빼 놓을 수 없는 곳이다.


숫자로 볼 때 십자군은 전혀 대군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 십자군 수는 15,000명을 넘지 않았다. 그 후 예루사렘에 주둔했던 십자군 기사들은 고작 300명 남짓했다. 소수의 십자군이 다수의 적대적인 지역을 관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십자군은 수적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군사적 요지에 수 많은 성채들을 건설하고 이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장악했다. 십자군 성채는 군사들이 주둔하는 요새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했다.


크락 데 셔벌리엘은 모슬렘의 중요한 도시 홈스(Homs)와 지중해를 잇는 중간 지점의 전략적 위치에 세워졌다. 이 성채가 완성되었을 때 모슬렘 사가(史家)는 “모슬렘 세계의 목에 박힌 가시”라고 표현했다.


이슬람교도들인 모슬렘들은 이 성채를 빼앗기 위해 여러번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무적의 “살라딘”도 이 성채를 공략하러 갔다가 성공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다음날 철군했다는 일화도 있다.


크락 데 셔벌리엘은 해발 750m 칼릴(Khalil)산 정상에 오각형 형태로 우뚝 서 있다. 길이는 남북이 200m, 동서가 140m나 되며, 면적만 해도 10,000평에 이리는 큰 규모다.

 

이 성채의 특징 중 하나는 성벽이 완벽한 이중구조라는 것이다. 우선 든든한 외성(外城)이 있고 그 안에 외성보다 훨씬 높게 쌓아 올린 내성(內城)이 성채를 둘러싸고 있다. 외성과 내성 사이는 도랑을 깊게 파고 물을 채워 해자(垓字)를 만들었다.

 

내성은 성벽을 직각으로 쌓지 않고 그 밑부분을 45도 각도의 경사면으로 만들어 해자를 넘어온 적들이 성 밑까지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성 밑부분을 경사지게 만든 축성법은 성벽 자체를 지진에도 견딜 수 있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성채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바닥이 꺼지면서 적을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장치, 몇 년을 공급할 수 있는 식량을 비축했던 곡식저장소, 거대한 물 저장소, 방의 길이가 120m에 달하는 대집회소, 예배소, 식당, 숙소, 미로와 같은 비밀 통로들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갑자기 어느 구석에서 육중한 갑옷을 입은 십자군 기사가 나타날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1271년 이집트의 술탄 베이발스(Sultan Baybars)는 군대를 이끌고 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 크락 데 셔벌리엘을 공격했다. 격전 끝에 외성을 뚫는 데는 성공했으나 내성은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 이를 함락시키는 것이 군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베이발스는 한 가지 계략을 꾸몄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성 안의 십자군들에게 한 통의 비밀 서신이 전달되었다. 그것은 십자군 총사령관이 보낸 밀서였다. 그 밀서에는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투항하여 유럽으로 철군하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저항하던 십자군들은 할 수 없이 베이발스에게 지중해를 통해 유럽으로 돌아가는 귀로의 안전을 보장한다면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베이발스가 이 조건을 수락하자 십자군 성채에는 곧 백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십자군이 전달 받았던 밀서는 베이발스가 꾸며낸 가짜였다. 그러나 십자군의 투항으로 이 성채는 파괴되는 운명을 면할 수가 있었다.

 

1271년 이 성채의 함락을 시작해서 십자군 성채들은 차례로 모슬렘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20년 후인 1291년, 십자군 최후의 보루 “아코”(Acco)가 함락됨으로써 십자군 운동은 실패로서 그 역사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빛은 동방에서 펌)

 

▲클락 데 셔벌리에 십자군 성채 

 

▲클락 데 셔벌리에 십자군 성채 

 

▲외성과 내성 사이에 방어를 위해 만들어 놓은 해자(垓子)

 

▲현재 십자군성을 보수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성채 내부 아랍 모스크

 

십자군 성은 이후 아랍인의 차지가 되었다. 그들은 십자군 성을 사원으로 사용하였는데이는

그 당시 코란을 읽어주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