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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아시아****국가들/⊙중국****동북지방

랴오닝성(遼寧省)ㅡ만주사변ㅡ일본군이 폭탄 사건 조작해 中 침략구실 만들어

by 삼수갑산 2022. 9. 28.

만주사변ㅡ일본군이 폭탄 사건 조작해 中 침략구실 만들어

 만주를 장악하기 위해 명분이 필요했던 일본 관동군은 1931년 9월 펑톈(현재의 선양) 철로에 폭탄을 설치하고 중국인에게 폭발 혐의를 씌웠어요. 관동군은 이를 빌미로 철로 주변을 장악하고 점령 지역을 확대했어요. 사진은 펑톈을 점령하는 관동군. /위키피디아

 

지난 18일 중국 선양에 있는 9·18역사박물관에서 만주사변 발발 91주년을 맞아 "국치(國恥·나라의 수치)를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기념식이 열렸어요. 중국의 항일 전쟁 참전 노병과 학생, 군과 정부 인사 등이 참석했죠. 이 기념식에서는 종을 14번 울렸는데, 1931년부터 1945년까지 14년간 일제에 희생된 중국인을 기억하는 의미였다고 해요.

만주사변은 1931년 일본이 중국 만주를 장악한 사건을 말해요. 중국은 이 사건을 일본이 벌인 대륙 침략 전쟁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는데요. 일본은 왜 만주를 차지하고자 한 것인지, 만주사변 이후 만주는 어떻게 됐는지 살펴볼게요.

◈1929년 미국서 시작된 대공황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은 전 세계를 강타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제 또한 치명타를 입습니다. 일본은 국내시장이 위축되자 해외시장을 확보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대공황 여파로 외국시장 문이 굳게 닫히고 무역 규모도 크게 줄었어요. 1930년에는 전년 대비 수출의 32%, 수입의 30%가 줄었죠.


만주는 대공황 이후인 1930년대에도 일본 총수출액의 8%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 가운데 설탕은 총액의 14%, 면직물은 12%, 종이는 12%, 기계와 가구는 37%에 달할 정도로 큰 시장이었죠. 또 만주는 중요한 원료 자원 공급지이기도 했습니다. 일본 총수입액에서 만주가 차지하는 비율은 11% 정도였어요. 그 가운데 콩류는 76%, 석탄은 64% 정도였죠. 만주의 대외무역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율이 컸던 거예요.

그런데 대공황 여파로 만주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이 악화하며 구매력이 줄자 일본의 수출액은 하락했어요. 이 무렵 중국 내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고조됐던 것도 수출 감소의 한 요인이 됐죠. 미국·영국 등도 자국의 상품 판매 시장 확대를 위해 일본이 만주에서 가지고 있던 독점적 지위를 흔들기 시작했어요. 일본을 견제하려 했던 중국을 뒤에서 후원해주기도 했거든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만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일 운동을 탄압하고 외국자본을 몰아내 만주 시장을 독점하려고 했어요. 이는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게 된 요인 중 하나가 됐죠.

◈과거부터 만주에 관심 보인 일본

사실 만주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꽤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만주 내 주요 지역인 랴오둥반도 뤼순, 다롄 지역 관할권을 얻었어요.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고 있던 1915년 혼란스러운 틈을 타 중국에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전달했는데요. 그 가운데 뤼순, 다롄 지역의 조차(租借) 기한을 99년이나 연장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어요.


이렇게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집착이 컸던 이유는 만주가 대륙 침략의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뤼순, 다롄 지역을 장악하자마자 가장 먼저 철도를 건설했던 사실로도 알 수 있죠.

그런데 만주사변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를 일으킨 세력은 일본 제국주의자들 중에서도 '관동군', 즉 군부 세력이었어요. 관동군은 일본이 만주에 건설한 철도를 관리하려고 주둔시켰던 군대예요. 만리장성의 관문인 산하이관의 동쪽에 주둔했다고 하여 관동군이라는 이름이 붙었죠.

만주사변은 관동군이 일본 정부와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만주 지역을 점령한 사건입니다. 당시 일본 군인들은 일본 정부에 불만이 많았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대공황으로 국방 예산이 대폭 삭감됐던 것이었어요.

 

만주사변 이전부터 일본 군부는 정부 요인(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 암살 혹은 쿠데타 시도 등 항명하는 사건을 계속 일으키고 있었죠. 즉, 일본 군부 세력의 불만이 만주사변으로 이어진 것이라 볼 수 있어요.

관동군이 만주를 장악하려면 명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자작극을 벌입니다.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펑톈(현재의 선양) 북부 교외의 류타오거우에서 폭발음이 들렸어요. 중국인으로 위장한 일본군 관동군 장교가 철로에 폭탄을 설치하고는 중국인에게 폭발 혐의를 씌웠어요. 관동군은 이를 빌미로 철로 주변을 장악하고 점령 지역을 확대해나갔어요.

심지어 같은 해 9월 21일에는 칙령도 없이 우리나라에 주둔해 있던 여단 1개가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파견됐습니다. 당시 만주는 장쉐량이라고 하는 중국 군벌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약 10만명에 달하는 장쉐량의 군대가 일본군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어요. 그리하여 약 3개월 만에 관동군은 동북 3성(지린성·랴오닝성·헤이룽장성)을 완전히 제압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만주를 점령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중국의 정세도 있었어요. 장제스가 이끌고 있던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국 공산당의 급격한 성장세에 위협을 느끼고 만주보다는 공산당 공격에 집중했어요. 만주사변 발발 후 국민정부는 장쉐량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병력조차 일본군과의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죠.

중국은 이 사건을 일본의 침략 행위로 보고 정식으로 국제연맹에 제소합니다. 사건을 조사한 국제연맹 조사단은 "당시의 폭음은 철도 노선에 어떤 실질적 피해도 주지 않았다.

 

설령 철도가 손상됐다고 해도 그 이유만으로 군사행동에 나선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발표했죠. 하지만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리며 침략 전쟁을 계속 확대해나갔습니다. 결국 이는 1937년의 중일전쟁까지 이어지죠.

◈통제와 감시 속에 살았던 사람들

만주사변 이후 만주는 어떻게 됐을까요? 1932년 3월 1일, 이곳에는 형식상 독립국인 '만주국'이 수립됩니다. 만주국 대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였어요. 일본은 국제연맹의 비난을 피하고자 "만주국은 푸이가 청나라의 부활을 꿈꾸며 세운 나라다.

 

우리는 그것을 도와준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그를 대표 자리에 앉혔던 것이죠. 하지만 푸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어요. 실권은 모두 일본인, 특히 일본군 장교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즉, 만주국은 일본 정부의 '괴뢰국'이었던 것이죠.

만주국은 정당 조직이나 의회 제도도 인정하지 않았고 독재 체제를 채택했어요. 경제 건설을 기치로 내걸고 철도 건설, 도로·항만, 통신 기구 건설 및 정비, 광산 개발 등을 실시했지만, 이는 모두 전쟁을 준비하려는 목적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연평균 7만명 넘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강제 이주당했어요.

특히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소련과 만주국의 국경인 북만주로 많이 이주시켰는데요. 그 목적 또한 땅을 개척하고 농사를 지어서 군량미를 증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주에 살던 일반 사람들은 철저한 통제와 감시 속에서 살아가야 했지요.

 

▲중국 東北 三省 / 원본출처 naver 백과

 

 일본이 만주국의 대표로 세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위키피디아

 

 동북 3성 중 랴오닝성 주변을 지나는 일본군. /위키피디아

 

 9·18 역사박물관에 만주사변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조형물. /위키피디아

 

글.사진출처 / chosun.com /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