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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델란드ㅡ투기광풍 원조는 17세기 튤립…그때도 서민들이 ‘영끌’ 매수

by 삼수갑산 2022. 10. 23.

비트코인도 울고갈 튤립 광기의 전말

투기광풍 원조는 17세기 튤립…그때도 서민들이 ‘영끌’ 매수

▲네덜란드 정물화가 한스 불롱히에르의 그림 '꽃이 있는 정물'(1639).흰 꽃잎에 붉은 무늬가 있는 튤립이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로 5500길더였다는 기록도 있다. 미 시카고대에 따르면 5500길더는 현재 가치로 환산할때 약 17만8200달러

(약2억원)/위키피디아

 

톈산산맥의 야생초였던 튤립은 페르시아와 터키를 거쳐서 16세기에 유럽에 전해졌다. 처음에 사람들은 단순히 이 꽃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열광했으나 얼마 안 있어 수익성 좋은 투자 기회를 발견했다. 튤립은 간혹 잎과 꽃잎의 배열, 무늬와 색이 다르게 나타나는 변종이 생겨난다.

 

모양과 색상이 진기하고 화려할수록 높은 값을 받았다. 역설적이게도 고가에 매매되는 화려한 튤립은 모자이크 바이러스에 감염된 병든 꽃이다. 새로운 품종 하나를 개발하는 데에 6~7년이 걸리고, 이 구근으로부터 판매용 새끼 구근을 어느 정도 확보하려면 다시 3~4년이 걸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진기한 품종의 구근은 천정부지로 값이 뛰었다. 푸른색과 흰색 바탕에 빨간 불꽃 무늬가 피어오르는 모양의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종은 전문가들 사이에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인정받았다. 가격은 1만 길더라는 믿지 못할 수준으로 올랐으나 정작 이 꽃은 너무나 귀해서 실제 거래된 적이 없다.

 

튤립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약간의 투자로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많은 사람이 꽃 재배에 달려들었다. 작은 땅뙈기를 사서 꽃을 재배해서 팔 수 있으므로, 이민자들이나 저임금 노동자들도 달려들었다. 네덜란드 전역에서 튤립 매매가 일어나고 구근 가격이 치솟았다.

 

15길더였던 ‘아드미랄’이 175길더가 되고, 45길더였던 ‘적황색 레이덴’이 550길더가 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 많은 사람이 꽃 재배와 매매에 뛰어들자 가격이 더 크게 올랐고, 이때까지 머뭇거리던 사람들도 덩달아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거부가 될 수 있다는 헛된 욕망이 사회를 휘감았다.

 

튤립 매매는 전형적인 투기 양식을 따랐다. 실제 손에 쥐고 있는 꽃만이 아니라 아직 땅속에 묻혀 있는 것까지 사고팔게 되었다. 구매자는 선금을 주고 나중에 수확할 꽃을 미리 사두는 것이다. 그가 받는 것은 꽃 모양과 색깔 등이 기록되어 있는 약속어음뿐이다.

 

사람들은 이 어음을 높은 가격으로 매매했다. 어음의 등장으로 튤립 매매는 현물 없이도 1년 내내 거래가 가능한 사업이 되었고, 갈수록 투기 성격이 강해졌다. 소위 선물거래(先物去來)가 시작된 것이다.

 

선물시장은 17세기 초에 목재·대마·향신료 같은 상품을 대상으로 형성되었는데, 시장 외부에서 일반인들이 같은 방식으로 거래한 것은 튤립이 처음이다. 이 거래는 누가 봐도 너무 큰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허황돼 보이는 거래를 ‘바람장사(windhandel)’라고 불렀다.

 

▲튤립을 따라가는 사람들, 그 종착지는 죽음의 바다. 꽃의 여신 플로라가 술을 마시거나 돈을 헤아리는 남녀와 함께 돛 달린 마차를 타고 가는데, 이 마차를 움직이는 것은 말이 아니라 바람이다.

 

종착지는 죽음이 기다리는 바다. 튤립이 그려진 깃발이 나부끼고,신과 사람들은 튤립을 손에 들거나 머리에 꽂았으며 그 뒤를 평범한 시민들이 부러운 표정으로 뒤쫓는다.

 

헨드릭 게리츠 포트가 1640년쯤 그린 풍자화 '플로라의 미친 마차'. 당대 네덜란드를 뒤흔들었던 튤립 광풍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수직 이동이 가능한 기회의 나라였다.

 

하지만 큰 수고없이 거액을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모두가 달려들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튤립가격은 한순간 투기의 거품이 꺼지며 나락으로 떨어졌다./위키피디아

 

내년 봄에 ‘하우다(Gouda)’ 가격이 폭등하리라고 예상한 상인은 재배농에게서 그 꽃을 선구매한다. 수확 시기에 300길더를 주기로 하고 예치금으로 10%인 30길더를 지불하면 계약이 성사된다. 꽃이 피면 그때 상품을 인수하고 잔금을 지불한다.

 

예상대로 일이 잘 풀려서 봄에 하우다의 값이 1000길더로 뛰었다고 하자. 그러면 재배농에게 잔금 270길더를 지불한 다음 꽃을 1000길더에 팔아 700길더를 번다. 꽃값이 계속 오르면 상인들은 이렇게 꿈같은 이익을 얻고 재배농들도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가격이 계속 올라준다면...

 

그러나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1637년 2월 첫째 화요일, 하를렘발 빅뱅(big bang)이 터졌다. 사람들은 이제 꽃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구근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시장에 물건을 내놓아서 이익을 실현하려고 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식으로 나오자 순식간에 거품이 꺼졌다. 얼마 전까지 1000길더에 팔리던 상품이 이제 500, 100길더 이하로 떨어지더니 심지어 5길더에 내놓아도 원매자가 없다. 막차 탄 사람들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었으리라는 점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튤립 광기에 대해 많은 사람이 거론했던 내용은 대개 여기까지다. 그렇지만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이런 파국이 일어난 다음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대처했느냐 하는 것이다. 꽃값이 폭락하자 원래 계약대로 구매하려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게 되었다.

 

정식으로 계약을 취소하려면 거래액의 10%를 지불하고 꽃을 되돌려주면 된다. 그렇지만 정직하게 위약금을 물어주는 사람은 극히 적었고 대부분 지불을 거부했다.

 

100~200길더는 가난한 사람이 평생 아껴 모은 돈인데, 이 돈을 그렇게 허망하게 날릴 수야 없지 않은가. 반대로 전 재산 털어 밭 사서 꽃 농사 지은 사람 역시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망할 수야 없지 않은가. 당연히 분쟁이 재판으로 이어졌다. 이제 법원에서 판결을 내려 이 문제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런데 네덜란드 법원은 사실상 판결을 내리지 않는 방향으로 갔다. 법원은 이 매매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여 합당한 판결을 내릴 수 없으니, 각 시 당국이 상세한 정보를 찾으라고 명령을 내리고 그동안 계약은 일시 보류 상태라고 선언했다.

 

시 당국 또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고 사실상 방치했다. 사법 당국과 행정 당국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보류 상태’가 지속되었다. 말하자면 이 문제는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는 메시지나 마찬가지다.

 

이 상황에서 구매자들은 원래 규정대로 10%의 위약금을 다 주는 대신 훨씬 값을 깎은 액수를 주고 해결하려 했다. 공증인 문서를 보면, 계약대로 위약금을 달라는 재배농의 주장에 대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하겠다’고 답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드디어 하를렘 시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규정을 내놓았다. 3.5%의 위약금을 지불하면 원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한 것이다. 다른 지역들도 이 기준을 많이 따른 듯하다.

 

이런 해결 방식은 좋은 일이었을까?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자칫 경제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가할 재앙을 비교적 무난하게 넘겼다는 것이 긍정적인 면이다. 법원은 많은 부유한 시민을 일시에 파산 상태에 밀어 넣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사자들이 크게 밑지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보상을 주고받으며 사태를 마무리하는 방향으로 합의하도록 유도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유례없는 투기 광풍 사태가 벌어졌지만 생각보다 큰 피해 없이 사회 자체가 충격을 흡수해 버렸다.

 

그렇지만 이런 해결 방식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무역·금융 국가였고, 그렇게 된 데에는 사회 전체가 쌓아올린 신용과 믿음이 큰 자산이었다.

 

그런데 명백한 계약 위반이 벌어졌는데도 뭉개고 있으면 아무런 제재를 안 받는다는 선례가 만들어졌다. 이런 것들이 사회의 내적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병든 꽃을 놓고 벌어진 투기 놀음은 경제와 금융 측면보다 사회의 정신과 문화 측면에 더 악영향을 끼쳤다.

 

▲작자 미상의 17세기 프랑스 그림 '튤립 구근 거래'. 튤립 판매자를 광대처럼 묘사했다/위키피디아

 

◈부유한 사회, 병든 꿈

 

‘황금기’로 불리는 17세기의 네덜란드는 번영하는 국가이며 부가 넘쳐났다. 게다가 사회 최하층에서 최상층으로 수직 이동이 가능한 기회의 땅이었다. 바닝 콕(Banning Cocq)이라는 대상인은 그의 아버지가 네덜란드에 들어올 때 유랑 걸식하는 사람이었는데, 단 한 세대 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부자 반열에 올랐다.

 

그렇지만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이야기는 오히려 ‘희망 고문’에 불과했다. 도시 장인(匠人)들은 새벽 4시부터 시작해서 하루 14시간 일을 해야 했다. 그렇게 일해서 1년에 300길더 정도 버는데(꽃값 1000길더와 비교해 보라), 이 수준이면 5인 가족이 치즈와 청어에 호밀 빵을 먹으며 겨우 연명할 정도였다.

 

아예 희망이 없는 사회면 모를까, 분명 유럽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이고, 돈이 도는 게 보이는 데다가, 실제로 큰돈을 벌어 상층으로 올라간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제한적인 일이다. 한푼 두푼 모으는 방식으로는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 몇 종류 있다. 행운을 바라거나(로또), 남의 돈을 훔치거나(사기), 헛된 기회를 노리거나(투기)….

 

글.사진출처 / chosun.com / 주경철의 히스토리 노바 /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