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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ㅡ에든버러(Edinburgh)ㅡ세인트자일스 대성당

by 삼수갑산 2022. 1. 22.

스코틀랜드ㅡ에든버러(Edinburgh)ㅡ세인트자일스 대성당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에든버러 시내의 하이 스트리트(High Street) 맞은 편, 구시가지의 중심지인 로열 마일(Royal Mile) 한 복판에 위치한 독특한 왕관 모양의 탑이 있는 성당이다.

 

854년경부터 지금 위치에 교회가 있었으나, 1120년에 당시 인기 높던 성인(聖人)인 세인트 자일스에헌정하는 성당이 건설되었다.당시 건물은 1385년에 불탔으나 곧 복구가 시작되었고 이후 16세기 초까지 개축을 거듭하면서 건물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화려해졌다.

 

현재의 건물 외관은 1829년 건축가 윌리엄 번(William Burn)에 의해 완성되었다. 대성당이긴 하지만 중세 이후부터는 스코틀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16세기 중반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존 녹스는 이 거리에서 프로테스탄트 동지를 규합했다.

 

녹스가 9세기에 설립된 역사 깊은 세인트자일스 대성당을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는 장소로 선택한 것은, 대성당이 에든버러 성과 국회 의사당을 이어주는 형태로 로열마일의 하이스트리트에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세인트자일스 대성당의 탑은 1495년에 건립된 것인데, 노르만 양식의 4개의 기둥이 윗부분의 가늘고 뾰족한 지주를 받쳐 주고 있어, 전체적으로 섬세한 인상을 준다. 이것은 이 성당 건축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난 부분이다.

 

내부에는 많은 역사적인 기념물과 기념탑이 있는데, 1911년에 세워진 고딕양식의 시슬(Thistle:엉겅퀴로, 스코틀랜드의 국화) 예배당은 나무 조각장식이 매우 화려하며, 그밖에 왕관 모양의 뾰족한 지붕(스코틀랜드 국왕 채플 역할), 정교한 솜씨의 스테인드글라스, 오르간도 널리 알려져 있다. 에든버러 출신의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영국 에든버러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뾰족한 왕관 모양의 지붕이 인상적인 이 대성당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곳이다. ‘위대한 숙녀’ 또는 ‘북쪽 나라의 아테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에든버러는 그야말로 매력적인 도시이다.

 

도시는 2개의 구역으로 확실히 구분된다. 수많은 드라마를 낳은 에든버러 성과 비운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살았던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이 있는 구시가지는 여전히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채, 찾아오는 이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한편, 신시가지는 바둑판처럼 깔끔하게 구획되어 있다. 신시가지는 18세기 이후, 영국의 국왕 조지 1세와 조지 4세 시대에 당시의 건축 양식을 도입한 도시 계획에 기초하여 형성된 것이다.

 

이 도시의 명칭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매달리다’라는 뜻의 게일어 에딘(edin)에서 유래한다고도 하고, 7세기에 노섬브리의 에드윈 왕이 축조한 ‘에드윈 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버러(burgh)라는 말은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라는 뜻이다. 스코틀랜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명한 에든버러 성은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높은 지대의 견고한 화산암 위에 축조되어 있다.

 

성 안에는 역대 스코틀랜드 왕의 휘장과 보물이 보존되어 있다. 찰스 3세는 1661년에 자신의 대관식에서 이들 보물을 몸에 걸친 마지막 왕이 되었다.

 

잉글랜드인은 스코틀랜드인이 자국의 상징으로서 소중히 지켜온 이 거대한 요새를 수세기 동안 여러 차례 공격했다. 그리고 마침내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왕은 성을 떠나 도망가야 했다.

 

성 안에는 노르만 양식의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세인트마거릿 예배당이 있다. 이것은 단랑식으로 지어진 소박하고 작은 성당으로서, 11세기 말에 스코틀랜드 왕 맬컴 3세의 아내인 마거릿을 위해 기증한 것이다.

 

맬컴 3세는 색슨인인 마거릿과 결혼하여 이 곳에 터를 잡았는데, 그의 아들 데이비드 1세가 1124년에 즉위했을 때는 이 바위산에 훌륭한 성이 완성되었다. 에든버러 성은 온갖 정치적 혼란과 문화 변동을 겪는 과정에서 왕궁, 성채, 보물창고, 병영, 감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1603년에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비극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이자 프로테스탄트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와 즉위하게 되었다. 이로써 스튜어트 왕조의 왕이 두 나라의 왕위를 겸하게 되었다.

 

왕은 집정의 거점을 런던으로 옮겼고, 그에 따라 에든버러의 정치적, 경제적 특권은 제한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 안의 생활용품은 모두 반출되었다.남겨진 것은 의자 하나뿐이라고 할 정도였다.

 

오늘날 성의 대부분은 군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수많은 전시품 가운데에는 제임스 2세의 손자 찰스 에드워드가 일으킨 1746년의 그 유명한 컬로든모어 전투에서 이용된 군기 조각도 있다. 이것들은 스코틀랜드인이 국가의 자랑스러운 유물처럼 소중히 다루는 물건이다.

 

제임스 4세 시대에 스코틀랜드의 수도가 되었던 에든버러는 인구가 8000명을 헤아렸다. 그리고 130년 후인 1636년에는 6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와 같은 급격한 인구 증가를 거주 지역 안에서 흡수하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15세기에 도시의방위를 위해 노르 호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에든버러는 수평 방향이 아니라 수직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서로 인접한 좁고 수직적인 가옥이 출현했는데, 이들은 마천루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10층 정도의 고층 주택을 형성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건축 양식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이 론마켓에 있다. 1620년에 지은 건물로서 글래드스톤스랜드라고 불리는 한 상인의 6층짜리 주택이 그것이다.

 

건물 아래쪽 3층 부분은 천장을 갖가지 색상으로 장식해 놓았는데, 아라베스크와 새, 꽃, 과일 등의 무늬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에든버러 성에서 홀리루드하우스 궁전까지 1마일의 거리, 즉 로열마일(왕궁로)이라고 불리는 약 1.6km의

거리가 에든버러 구시가지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

 

홀리루드하우스 궁전과 에든버러 성은 동서로 뻗은 번화가의 양 끝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로열마일은캐슬힐, 론마켓, 하이스트리트, 캐넌게이트 등의 4개 거리로 갈라진다. 로열마일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서민의 거리이기도 한다.

 

그 곳에는 귀족과 상인, 기술자의 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 거리에서 사람들은 군주를 칭찬하거나 비난하기도 하고, 종교에 대한 논쟁으로밤을 지새우거나, 돌연 광신적인 언동을 할 수도 있었다.

 

이 곳은 현재도 관광객들이 왕년의 역사를 다시금 음미할 수 있는 장소이다. 1639년에 스코틀랜드 의회가시작되고 의사당은 의원들로 메워졌지만, 1707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한 국왕 아래 합병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형성하게 되자 의회는 폐지되었다. 국회 의사당은 당초 상품 거래소로 건립된 것이지만 나중에는 스코틀랜드 고등재판소가 되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그 곳의 독특한 천장인데, 네오 고딕 양식의 끝이 뾰족한 들보가 조합된 것이다. 또한 선명한 색채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뮌헨의 궁정화가 빌헬름 폰 카울바흐의 작품이다. 로열마일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홀리루드하우스는 현재 영국 왕실이 에든버러를 방문할 때 실제로 사용하는 궁전이다.

 

이 궁전은 1128년에 건축된 성아우구스티누스회의 성당을 1498년에 제임스 4세의 명에 의해 궁전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그러나 종교 개혁기에 흔적도 없이 파괴되고 말았다.

 

다만 스코틀랜드 왕의 숙소 부분은 궁전으로 모습을 바꾼 채 남아 있다. 궁전은 1544년과 1650년에 2차례의 화재를 당했으나, 1671년에 찰스 2세 때의 궁정 건축가였던 윌리엄 브루스 경에 의해 재건되었다.

 

정면 입구에는 일종의 난간이 만들어져 있다. 그것은 2쌍으로 된 도리아식 원주와 관을 인 원형 닫집을 가진 문 위에 있다. 이를 사이에 두고 2기의 탑이 마주보고 솟아 있는데, 왼쪽이 제임스 5세의 탑이며, 오른쪽은 브루스 경이 좌우 대칭이 되도록 다시 세운 것이다. 그 밖에 훌륭한 것으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양식에 의거하여

조성한 네모꼴의 안뜰을 들 수 있다.

 

파사드는 안뜰을 에워싸는 형태로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등 3가지의 고전 양식으로 나뉜 갤러리 위에 솟아 있다.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은 역사적, 예술적으로도 유명할 뿐만 아니라, 비극적인 운명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살았던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그녀가 살았던 방의 세부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신시가지는 급증하는 인구를 소화해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에 의해, 합리적인 설계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층 건축물로도 모든 인구를 흡수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신시가지는 노르 호의 일부, 구체적으로 말하면 에든버러 성의 북쪽에 있는 지역을 매립해 만들었다.

 

1767년에 도시계획의 입찰이 시행되었는데, 당시 무명이었던 23세의 젊은 건축가 제임스 크레이그에게낙찰되었다. 그의 설계는 바둑판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조지스트리트가 그 중심축을 이룬다. 그의 도시화 계획안은 도시 전체에 통일된 인상을 갖게 하려는 이전부터의 계획을 한층더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샬럿 광장인데, 이것은 도시의 고전파 건축의 걸작이다. 이 광장을 설계한 사람은 크레이그의 계획을 이어받은 건축가 로버트 애덤이다.

 

그가 죽기 직전에 밝힌 자신의 설계 이념에 따르면, 건축가 존 우드 1세가 배스에서 궁전의 파사드 뒤쪽에 서로 등을 맞대고 죽 늘어선 집들을 감춰 버린 설계를, 이 광장의 건축에 응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기념비적인 특색은 없지만 기품과 조화가 있는 인상적인 주택가가 완성되었다. 네모꼴 광장은 특징적인 4개의 파사드로 칸이 나뉘고, 그 뒤쪽으로 집들이 숨듯이 배치되었다.

 

이와 같은 양식의 가옥은 특권 계층의 것으로서 상당한 면적을 차지했다. 그들은 대가족인데다 하인도 같이 사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신시가지는 상당히 호화로운 이들 건축에 의해 양식적인통일을 이루었다.

 

가장 대표적인 주택가로는 조지스트리트, 퀸스트리트, 프린세스스트리트, 그리고 시인 월터 스콧이 살았던 캐슬스트리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에든버러의 ‘샹젤리제’ 또는 로열마일의 현대판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도시는 또한 ‘북쪽 나라의 아테네’로도 불리고 있는데, 이는 프린세스스트리트에 스코틀랜드 왕립 아카데미와 국립 스코틀랜드 미술관 등 고대 그리스를 모델로 한 건축물이 다수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쪽으로 좀더 가면, 칼튼 힐의 한 자락에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을 모방한 왕립고등학교를 볼 수 있다.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첨탑

 

1495년에 건립된 것인데, 노르만 양식의 4개의 기둥이 윗부분의 가늘고 뾰족한 지주를 받쳐 주고 있어, 전체적으로 섬세한 인상을 준다. 이것은 이 성당 건축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난 부분이다.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첨탑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청동 조각품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청동 조각품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성당 묘지

 

▲성당 묘지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