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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ㅡ쿠트나 호라ㅡ해골 성당(Kostel Všech svatých)

by 삼수갑산 2021. 12. 2.

쿠트나 호라(Kutná Hora)ㅡ해골 성당(Kostel Všech svatých) 

▲쿠트나 호라 해골 성당

 

프라하에서 동쪽으로 72㎞ 떨어져 있는 쿠트나 호라 마을에는 중세에 세워진 거대한 고딕풍 사원이 있다. 이 사원의 장식품은 10만명 분의 인골로 되어있다.

 

오래된 사원 지하에 뼈무덤이 발견되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인골이 장식품으로 쓰인 사례는 흔하지 않다. 사원 안에 있는 작은 예배당은 4만 명 분의 인골로 장식돼 있다.

 

예배당 위에는 해골들이 무수히 달린 2.4m 길이의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성당 안에는 인골로 만들어진 종이4개나 된다. 종 하나의 무게는 4t이며, 세상 모든 종 가운데 장송곡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소리를 낸다고 알려져 있다.

 

이 사원에서도 성찬식이 열린다. 포도주를 담는 성배가 다리뼈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작품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고딕 건축의 특징인 아치도 역시 해골과 팔 다리뼈로 만들어졌다.

 

해골 사원'의 기원은 흑사병이 창궐했던 1,3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죽음을 앞둔 병자들은 성스러운 곳에 묻히려 마지막 힘을 다해 성당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나 교회 공동묘지는 순식간에 다 찼고 남은 시신들은 성당 지하토굴 안으로 던져졌다. 지하에서 썩어가던 유골들이 지상으로 나온 때는 1870년. 시토수도회의 한 수도사는 목각사에게 뼈로 성당을 장식할 것을 지시했다.

 

이 수도사가 신도들에게 생의 무상함을 깨우쳐주기 위해 '해골 사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14세기에 지어진 정통 고딕 양식의 납골당 안에 두개의 체플이 있었다.

 

그러나 1421년 후스전쟁 당시 납골당이 불에 타 무너져 버렸다. 오늘날의 납골당은 유명한 이탈리아 건축가 산타니에 의해 1703년부터 1710년 사이에 체코 바로크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다 짓고난 후 건물의 분위기가 이상하여 조금 수정하였는데 서쪽 정면 두개의 탑 사이에 보호물이 그때 세워졌다. 산티니는 또한 피라미드 위의 왕관이라든가 장식 촛대 같은 다른 보충물과 뼈들로 장식하도록실내를 개조하였다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체코 쿠트나 호라 해골 성당 

 

 

▲체코 쿠트나 호라 해골 성당

 

▲체코 쿠트나 호라 해골 성당

 

▲내부

 

해설에 의하면 해골 교회는 인생의 허무와 덧없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죽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서로 다른 길을 살았건만 죽어서 같아진 혼백 떠난 하얀 뼈, 나뭇가지와 무엇이 다를 것이냐? 구별할 수 없이 뒤섞인 생의 잔해를 보며 ‘언젠가는 죽어야 함을 잊지 말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상기한다.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 보다는 죽음에 대한 미지와 불안이 아닐 것인가? 러시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비교적 넓은 지하실, 눈앞에 전개된 공간은 바로 기이한 감각, 불가사의의 별천지다. 실내 네 귀퉁이, 창고 같은 쇠창살 안에 뼈와 해골을 무더기로 빽빽이 쌓아올린 큼직한 봉분이 있다. 원래 여섯 개 있었던 뼈 무덤 중 두 개는 린트가 없애버렸다고 한다.

 

홀 중앙에는 두개골만으로 꾸민 네 개의 피라미드가 서있는데 입에 뼈를 하나씩 물고 있는 해골의 탑 맨 위에는 애기 천사가 앉아 트럼펫을 불고 있다. 그 위 천정 한 가운데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의 뼈를 다 사용해서 만들었다는 것으로 꽃 줄과 사슬 등, 다양한 부속이 모두 해골을 교묘하게 꿰어 맞춘 무척 공 들인 걸작이다. 타다 남은 여섯 개의 초가 보이는데 전기가 없던 시절, 촛불 나풀대는 깊은 밤을 상상하니 별로 유쾌해지는 기

분은 아니다.

 

▲꼬부라진 뼈를 맞춰 ‘1870 F. Rint z České Skalice’라고 적은 프란티섹 린트 자신의 서명 판이 붙어있다.

물론 이 글씨도 인간의 뼈로 썼다.

 

▲해골 성당 내부

 

전설에 의하면 뼈를 정리하고 장식하는 작업은 1511년 반 맹인이었던 시토 수도회의 한 수도사에 의해 시작됐다고 하는데 오늘날과 같은 뼈로 만든 작품이 본격적으로 탄생한 것은 1784년 황제 요셉2세가 수도원을 폐지하면서 소유권이 귀족인 슈바르젠베르크 가문에 넘어간 후인 1870년, 그들에게 채용된 체코 스칼리체(Skalice) 출신의 나무조각가 프란티섹 린트(František Rint)에 의해서였다.

 

뼈는 모두 소독한 후에 회칠해서 사용했고 쓰고 남은 조각은 다시 매장했다고 한다. 더 이상 예배의 장소가 아닌 백골의 전시장, 수많은 관광객은 이제 골고다 언덕의 흙이 아니라 산같이 쌓인 뼈 무덤을 보고자 모여들고 있다.

 

▲샹들리에

 

지하 교회 중앙에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뼈를 이용한 샹들리에가 있다. 샹들리에 밑에는 지하 납골소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데 거기에는 15명의 부유한 시민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납골소 주변에는 바로크 양식의 촛대들이 있다.

 

▲해골 성당 내부 샹들리에 

 

▲해골 성당 내부 샹들리에

 

▲해골 성당 내부 샹들리에

 

▲해골 성당 내부 샹들리에

 

▲해골 성당 내부 샹들리에

 

▲해골 성당 내부 샹들리에

 

▲해골 성당 내부

 

▲해골 성당 내부

 

▲슈바르젠베르크 가문 문장

 

한쪽 뼈 무덤 아치에는 슈바르젠베르크 가문의 정교한 문장이 걸려있다. 도안의 오른쪽 아래에 까마귀가 부리로

터키 병사의 눈을 파먹는 광경이 보이는데 흘루보카성 대문 손잡이에 있던 장식과 같은 유형이다.

실제의 슈바르젠베르크 문장에도 이 장면이 들어있다고 하며 까마귀 골격도 사람 뼈로 만든 모양이다

 

▲슈바르젠베르크 가문 문장

 

▲슈바르젠베르크 가문 문장

 

▲슈바르젠베르크 가문 문장

 

▲예수의 그리스 표기인 IHS가 십자형으로 장식

 

▲해골 성당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