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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아시아*****국가들/⊙이라크*****기행

이라크ㅡ나자프(Najaf)ㅡ이락 나자프 이맘 알리사원

by 삼수갑산 2021. 10. 4.

나자프(Najaf)ㅡ이락 나자프 이맘 알리사원 

▲이맘(imam, 아랍어로 '지도자' 또는 '모범'이라는 뜻)

 

이슬람교도 공동체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이 명칭은 〈코란〉에서 지도자와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용어로 여러 번 사용되었다. 이맘이라는 직책의 기원과 기준은 이슬람 사회의 여러 분파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왔는데 이 차이는 이슬람을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라지게 한 정치적·종교적 기준이 되었다.

 

수니파에서 이맘은 예언자 마호메트의 계승자를 지칭하는 칼리프와 동의어로 쓰였으며 종교적 기능이 아닌 행정적·정치적 기능을 담당했다. 그는 사람들에 의해 선출되며 실수를 범할 수 있고 또 직접 죄를 지었다고 해도 만일 이맘 자신이이슬람의 계율을 잘 지키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4번째의 칼리프이면서 마호메트의 사위인 알리가 죽은(661) 뒤 그 지위의 계승권에 대한 정치적 불일치로 인해 시아파의 이맘은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다. 알리의 추종자들은 전이슬람 공동체에 대한 지도권을 알리의 자손들에게 넘기려 했던 것이다.

 

시아파 이슬람에서 이맘은 이제 절대적인 영적 권위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 인물이 되었다. 마호메트에 의해 전해진 〈코란〉에 관하여 시아파들로부터 신비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게 된 알리와 그의 계승자 이맘들은 9~10세기의 신플라톤주의 영향 아래에서 태고의 빛이나 신에 의해 비추어진 인간 그리고 신에 의해 정해져 죄로부터 보호받는 사람으로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수니파 이슬람에서 필수적 요소인 공동체의 총체적 합의(ijm)를 통하지 않고 교의상의 중요한 문제를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계시를 해석했다. 최후의 이맘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리자 숨은 이맘에 대한 신앙이 생겨났는데 이 숨은 이맘은 구세주(mahd)와 동일시되었다.

 

합법적으로 인정된 이맘의 수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다만 주요종파 가운데 사비야 이스마일리야(7이맘파)는

7명의 이맘을 주장했고, 이스나 아샤리야(12이맘파)는 12명의 이맘을 주장했을 뿐이다.

 

이맘은 칼리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와, 신학자 아부 하니파, 앗 샤피이, 말리크 이븐 아나스, 아흐마드 이븐 한발, 알 가잘리, 무하마드 아브두 등과 같은 인물에 붙일 때에는 명예로운 경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맘이라는 명칭은 가끔 모스크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특별히 교육받은 이슬람교도에게도 붙여진다

 

▲이라크 시아파 이슬람 최대 성지인 나자프 이맘 알리 사원. 최근의 긴장 사태로 오가는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180km 떨어진 나자프는 ‘사자(死者)의 도시’로 불린다.시내 한가운데 시아파 최고 성소인 이맘 알리 사원이 자리 잡고 있고, 북쪽에는 시아파 교도라면 누구나 묻히고 싶어 하는 600ha 규모의 공동묘지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군과 과도정부군에 맞서 시아파 지도자 무크타다 알 사드르의 메흐디 민병대가 전투를 벌이는 곳도이 공동묘지 일대다. 중부 카르발라의 이맘 후세인 사원과 함께 시아파 최대 성소로 꼽히는 이맘 알리 사원에는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사촌이자 사위인 이맘 알리 이븐 아루 탈리브가 묻혀 있다.

 

이맘 알리는 당시 수니파와의 갈등 때문에 암살당했다. 이맘 알리의 무덤은 977년경 처음 만들어졌으나 수차례 파괴되었다가 다시 지어지면서 사원의 형태를 갖췄다.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은 1991년 이 사원을 시아파 저항세력의 근거지라며 파괴했다.

 

일각에서는 후세인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2년 뒤 복구돼 다시 문을 열었다. 이맘 알리 사원은 메카로 향하는 성지순례의 출발점으로 매년 수백만명의 순례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2004-8-16일 이라크 각지에서 나자프의 시아파 성소인 이맘 알리 사원으로 모여든 2000여명의 성직자와 민간인들. 이들은 비무장으로 인간방패를 형성해 이라크 보안군과 미군의 사원 공격을 막겠다고 밝혔다.- 나자프=로이터 뉴시스

 

이라크인들은 가로 세로 80m에 불과한 사원의 뜰에 집결한 뒤 시아파 지도자인 “무크타다 알 사드르”를 연호하며 옥쇄(玉碎)를 다짐했다. 로이터는 자원자 대부분이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고 전했다.

 

자원자인 파딜 아메드는 “미군이 사원을 공격하면 맨몸으로 전차에 맞설 것”이라며 “사드르와 나자프를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대항하겠다”고 주장했다. 비무장 이라크인들이 이맘 알리 사원에 인간띠를 형성하면서 이라크 과도정부와 미군은 딜레마에 빠졌다.

 

8. 12일부터 미군 2000여명과 보안군 1800여명이 나자프 북쪽 공동묘지에서 총공세를 펼치고 있지만시아파가 ‘성소 중의 성소’로 꼽는 사원까지 파괴할 경우 정치적 부담이 엄청나기 때문. 17일에는 미군 전차가 이맘 알리 사원 500m 앞까지 진격했다가 후퇴한 적도 있다. 무장한 메흐디 민병대의 저항도 필사적이다.

 

CNN방송은 16일 200여명의 민병대원들이 “사원이 공격당하면 몸에 두르고 있는 폭탄을 터뜨리겠다”고위협하는 모습을 전하기도 했다. 4일부터 시작된 미군과 보안군의 나자프 총공세로 메흐디 민병대 수백명과 미군 8명이 사망했다.

 

8.15일 이라크 입법부 구성을 위해 소집된 국민회의는 최악의 나자프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대표단 60명을 현지에 급파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나자프 사태의 중재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의 반발을 우려하는 과도정부는 일단 ‘저항세력은소탕하되 성지는 보호한다’는 방침을 세웠다.이라크 내무부는 “이라크 보안군에 대해 성스러운 이맘 알리 사원을 공격하지 말 것을 분명하게 지시했다”고 밝혔다

 

▲미군의 폭격으로 손상된 이맘 알리사원 외벽 (2004-8-23)

 

시아파에게 있어서 이맘 알리 사원의 의미는 어떤 상징성의 레벨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성소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맘알리 사원을 훼손하거나 경솔하게 사원내부로 진입을 했다가 유혈충돌을 빚게된다면.. 즉 피를 흘림으로써 그 신성함을 실추시키게 된다면 큰 대가를 치루게 된다. 만일 이맘알리 사원이 없었다면 알사드르는 진작에 미군의 폭격에 희생이 되었을 것이다

 

▲이맘 알리사원의 손상된 부분

 

▲알리

 

◆알리(Ali, 정식 이름은 Al ibn Ab lib)

 

600경 메카~661. 1 이라크 쿠파출생, 이슬람의 예언자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4번째 칼리프(656~661 재위) 그가 칼리프에 오른 것이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이슬람교를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리시키는 주요원인이 되었다.

 

시아파는 알리를 예언자의 유일하고 진실한 계승자로 간주했다. 알리는 지방의 한 씨족장인 아부 탈리브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곤궁에 처하자 마호메트가 알리를 양자로 삼았다. 그때 마호메트는 메카에서 아직 상인이었다.

 

마호메트는 어린시절에 알리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마호메트가 신의 부름을 받아 예언자가 되었을 때

알리는 아직 10세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초기 신자들 중에 속했으며, 평생 동안 마호메트의 충실한 추종자로 살았다.

 

전설에 의하면, 622년 마호메트가 그의 암살 음모를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한 날 밤, 알리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마호메트로 분장하여 마호메트의 침대에서 잤다고 한다. 또한 마호메트는 자신이 메카의 상인으로서 위임받았던 모든 소유물을 원래 소유자들에게 되돌려주라고 알리에게 부탁했다.

 

알리는 이것을 실행한 다음에 메디나로 향했다. 메디나에서 그는 마호메트의 딸 파티마와 결혼하여 하산과 후사인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 알리는 이슬람을 강화시키기 위해 마호메트가 실행한 군사원정기간 동안에 보기 드문 용맹을 보여주었고 항상 가장 많은 전리품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마호메트의 언행의 기록자 중의 하나였고 몇 차례의 중요한 임무를 지휘하도록 선발되기도 했다.

 

메카의 적대적인 주민들이 전쟁을 치르지 않고 마침내 이슬람을 받아들였을 당시 카바 신전에 있는 이교도의 우상들을 파괴해버린 사람은 바로 알리였다. 마호메트는 632년 6월 8일 죽었는데, 일부사람들은 마호메트가 마지막 메카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후계자로 알리를 분명하게 지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을 거부하고 마호메트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죽었다고 주장한다. 알리는 마호메트의 장례식 참석중에 마호메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마호메트의 부인들 중 한 사람인 아이샤의 아버지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리는 얼마 동안 아부 바크르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교도 공동체를 부족간의 유혈투쟁에 몰아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결코 적극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은퇴하여 종교적 임무를 자신의 주요한 일로 삼고 조용한 생활을 했다.

 

알리의 노력에 의해 최초로 연대별로 배열된 〈코란〉이 나올 수 있었으며 〈코란〉과 하디스(예언자 마호메트의 언행록)에 대한 그의 탁월한 지식으로 여러 가지 법적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칼리프를 도울 수 있었다. 3대 칼리프 우스만이 살해된 뒤 메디나의 이슬람교도들은 알리를 칼리프로 추대했다.

 

그는 오랜 주저 끝에 수락했다. 짧은 재위기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 대부분은 타락한 국정운영을 물려받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전임 칼리프들이 〈코란〉과 마호메트에 관한 전승을 발전시키기로 하고도 이를 소홀히했다는 사실을 통찰한 알리는 이슬람의 사회적 정의와 평등사상을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의 정책은 이슬람교도들의 정복전쟁중에 부를 축적해왔던 메카의 쿠라이시 귀족들의 권익에 타격을 주었다. 알리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그들은 우스만의 살인자들을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알리에 대한 반란을 선동했다.

 

그 반란의 지도자는 마호메트의 미망인이자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의 딸인 아이샤와 함께 유력한 2명의 메카인이었다. 낙타(아이샤를 태운 낙타) 전투라고 불리는 이 반란은 진압되었다 (카멜 전투). 그후 우스만의 혈족이자 시리아의 총독인 무아위야가 2번째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무아위야는 진압되는 순간에 중재를 제의함으로써 패배를 모면했다. 알리는 그것이 계략이라는 것을 간파했지만 자신의 군대 중재의 결정을 받아들일 것을 그에게 강요했다. 이것은 알리의 지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더우기 그 직후부터 알리는 처음에 중재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던 바로 그 사람들과 싸워야만 했다. 이제 와서 그들은 중재결정을 비난하고 나섰던 것이다. 하와리지(Khawriji:이탈자들)라고 불리는 그들은 나라완의 전투에서 알리에게 패배했다.

 

그동안 무아위야는 호전적인 정책을 추구했고 660년말에 알리는 이미 이집트와 히자즈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이라크 쿠파의 한 모스크에서 기도하고 있던 알리는 나라완에서 살해된 자들의 복수를 시도한 한 하와리지가 휘두른 독검에 찔렸다. 이틀 후 알리는 사망했고 쿠파 근처에 묻혔다.

 

알리의 정치적 연설과 설교, 서한 및 발언들은 앗 샤리프 알 라디(1015 죽음)가 수집하여 이븐 아비 알 하디드(1258 죽음)의 주석과 함께 〈수사학의 길 Nahj al-balghah〉이란 책으로 나왔는데 이것은 아랍 문학에서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