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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ㅡ천재 화가 클림트 떠난 지 100년…혜성처럼 떠올라 불멸의 예술가로

by 삼수갑산 2022. 4. 27.

화가 클림트(Gustav Klimt)

천재 화가 클림트 떠난 지 100년…혜성처럼 떠올라 불멸의 예술가로

 

거리를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그'와 마주치게 된다. 각종 포스터가 현란할 정도로 붙어있어서 '그'를 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는 '키스'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다. 지금 빈은 '클림트의, 클림트에 의한, 클림트를 위한' 도시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그만큼 클림트로 충만하다.

올해는 클림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0년 되는 해다. 클림트의 힘을 아는 빈은 세심하게 2018년을 준비했다. 레오폴트 뮤지엄은 'Artist of the Century(세기의 예술가)'란 제목의 클림트 특별전을 마련했다. 응용미술박물관(MAK)은 '클림트의 마법정원(Klimt's Magic Garden)'을 선보이고 있다. 분리파 회관은 몇 개월에 걸친 외부 청소를 끝내고 깔끔한 모습으로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를 보기 위해 세계에서 몰려오는 팬들을 맞이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클림트의 본가(本家)인 벨베데레(Belvedere)에 가면 '키스(Kiss)'와 '유디트(Judith)'가 언제나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그러나 올해 클림트를 가장 인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은 빈을 대표하는 미술사박물관(KHM·Kunst Historisches Museum)이다. KHM은 'Stairway to Klimt(클림트에 이르는 계단)'란 아주 특별한 선물을 기획했다.

 

이 기획은 KHM의 메인 홀 중앙에 거대한 임시 계단, 일명 '클림트 다리'를 설치해 클림트가 그린 벽면화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벽면화의 아름다움은 12m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황홀한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클림트는 세기말의 빈을 살다간 대단한 화가였다. 천재라는 표현도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빈은 말 그대로 예술의 도시다. 회화는 물론 건축, 조각, 디자인, 음악, 문학 등 모든 장르에 걸쳐 세계적인 인물들을 무수히 배출했다. 그런데 빈 시민도, 여행객들도 유독 클림트에 열광한다. 올해만의 일이 아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혜성처럼 떠오르다

클림트는 1862년 가난한 금(金)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과 금에 대한 관심을아들에게 물려줬다. 클림트는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특히 발군의 드로잉 실력을 인정받아 빈의 공예미술학교에 입학했다(1876년). 학교에서도 클림트는 친구 프란츠 마츠(Matsch)와 함께 돋보였다.

 

교수들은 아직 학생인 두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 당대 미술계의 거장이며 클림트의 롤모델이었던 한스 마카르트(Makart)는 이들을 조수로 쓰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한 클림트는 마츠, 친동생 에른스트와 함께 '쿤스틀러 콤파니(예술가 회사)'를 만들어 미술 시장에 뛰어들었다. 예술가로 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1888년에 찾아왔다.

 

▲빈미술사박물관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클림트의 초기 작품들. 왼쪽은 그리스 예술을, 오른쪽은 이집트 예술을 상징한다.

 

당시 빈의 역사주의 화풍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황금색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클림트만의 특징이 보인다.

미술사박물관은 클림트 서거 100년을 맞아 그의 벽면화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도록

임시계단과 관람대를 설치했다. /송동훈

 

링슈트라세 중심에 위치한 부르크 극장의 천장화 일부를 의뢰받은 것이다. 이 극장은 오스트리아 공연 예술의 요람이었고,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재정을 지원하는 곳이었다. 당시로써는 가장 중요하고 권위 있는 프로젝트였다. 클림트는 자신이 맡은 바를 완벽하게 해냈다.

 

황제는 크게 기뻐했고 클림트에게 황금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성공은 또 다른 기회를 불러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방대한 예술품을 전시하기 위해 지어지고 있는 미술사박물관의 벽면을 그리는 작업이 주어진 것이다. 이 또한 대성공이었다. 연이은 성공으로 부와 명성이 따라왔다. 그는 아직 서른 전이었다.

▶기존의 관습에 도전하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클림트는 여행을 떠났다. 넓은 세상은 새로운 안목을 화가에게 안겼다. 특히 클림트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그동안 맹목적으로 따랐던 빈 미술계의 전통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왜 우리는 과거의 역사만을 소재로 삼아야 하는가? 왜 화풍은 옛 전통을 따라야만 하는가? 왜 세계 미술계의 새로운 흐름은 빈에 소개되지 않는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클림트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변화였다. 새로움이었다. 자신만의 개성이었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자신을 비롯한 오스트리아의 예술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빈 미술계를 지배하던 '미술가 연맹'이 변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클림트는 자신도 속해 있는 이 단체 안에서 변화를 시도했다. 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던 미술가 연맹은 클림트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검열이란 최악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클림트와 동료들은 연맹을 탈퇴했다. 그들은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분리파(Sezession)'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1897년). 클림트는 분리파의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분리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공간인 분리파 회관의 건립도 진두지휘했다.

 

분리파 회관은 외관과 내부에서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함으로써 빈의 다른 건물들과 차별화했다. 들어가는 입구 위에는 자신들의 모토를 달았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이는 클림트 예술의 정수(精髓)이기도 했다.

▶공공예술과 결별하다

오스트리아는 제국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북이탈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유럽의 대표적인 다민족국가였다. 19세기에 깨어난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제국의 존립을 위협했다.

 

분리파는 다양한 예술 분야의 조화, 균형, 통합을 추구했다. 제국의 비전과 일치했다. 제국 정부가 분리파를 후원한 이유다. 클림트에게 빈 대학 본관 건물의 천장화 중 철학, 의학, 법학 부분을 맡긴 까닭이기도 하다.

 

클림트는 과감하게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표현 방식을 버렸다. 대신 모호한 상징, 난해한 이미지, 과도한 누드로 천장화를 채웠다.지성의 전당(殿堂)은 경악했다. 자신들의 철학은 명확하고, 의학은 신성하며, 법은 정의 그 자체였다. 그런데 클림트의 작품에 나타난 철학은 모호하고, 의학은 불순하며, 법은 폭력에 불과했다.

 

클림트는 예언자처럼 20세기에 펼쳐질 극단과 광기의 시대, 폭력과 위선의 세계를 내다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이성적이며 문명은 진보한다'고 믿고 있는 자유주의자들에게 클림트의 작품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격렬한 반대와 논쟁이 제국의 수도를 강타했다.

 

자유주의자들끼리의 분열이었다.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에 맞서 제국을 통합해야 하는 정부에 자유주의 진영의 분열은 치명타였다. 결국 정부는 클림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클림트는 자신의 후원자들을 통해 대학 천장화 3부작을 사들이고, 다시는 정부의 작품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1905년).

▶황금빛 불멸로 도피하다

클림트는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대중 예술가로서의 길을 포기했다. 철학적이고 우의적인 그림 대신, 에로틱하고 화려하며 관능적인 여인의 초상과 인상주의적인 풍경으로 도피했다.

 

클림트의 가치를 아는 소수의 세련된 상류 계층 부자들이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기 위해 줄을 섰다. 클림트는 1903년에 동로마제국의 황금빛 모자이크 예술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도시 라벤나를 두 차례 방문했다.

 

▲세기말 빈 예술의 상징적 존재인 클림트(왼쪽)와 그의 대표작인 ‘키스’.

그의 후반기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탐미적 성향과 장식적 패턴이 특히 도드라진 걸작이다.

/위키피디아

 

여행은 천재에게 황금이라고 하는 재료와 모자이크라고 하는 표현 방식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가져다 줬다. 금세공사의 아들은 이제 자신의 작품에 황금을 다양하게 활용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 '키스'(1907~1908년)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1907년)는 이 시기에 탄생했다. 클림트는 1918년 2월 6일 평생의 동반자였던 에밀리 플뢰게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딱 1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여전히 클림트를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미술사박물관의 임시 관람대는 그의 벽면화를 눈앞에서 보기 위해 찾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모두가 클림트의 작품을 보며 감탄하고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다.

 

나란히 그려져 있는 클림트의 친구 마츠의 작품에 관심을 쏟는 사람은 없다. 비전문가의 눈에는 별 차이가 없는데도 말이다. 비정하다. 벽면화보다 더 중요한 중간 천장화에 주목하는 사람도 없다.

너무나 잘 그려진 16개의 중간 천장화는 모두 클림트의 스승 마카르트의 작품이다.서글프다. 왜 마카르타와 마츠는 잊혔고, 클림트만 기억될까? 클림트만이 용기 있게 과거의 틀을 깨고 자신의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예술에 도전했기 때문이다.올해 빈과 빈을 찾는 수많은 사람이 클림트에게 열광하는 이유다.

 

▶'키스'만큼 사랑받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1억3500만달러에 팔려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키스'다. 한때는 키스와 쌍벽을 이룬 작품이 있다.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라 불린 온통 황금으로 치장된 한 여인의 초상화다. 원래 이름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Adele Bloch-Bauer)'. 모델이자 원소유주가 유대인이란 이유로 나치에게 빼앗겨 키스와 나란히 벨베데레에 걸려 있었다.

 

2006년 블로흐-바우어 가문의 상속녀가 8년의 법정 투쟁 끝에 그림을 되찾았다.그녀는 같은 해 글로벌 화장품 기업 에스티 로더 창업자의 아들에게 1억3500만달러라는 천문학적 가격에 그림을 팔았다. 지금은 뉴욕의 노이에갤러리에 전시돼 있다. 이 과정을 그린 영화 '우먼 인 골드'도 있다.

▲목가 (1884)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73.5x49.5cm / 빈 역사박물관 소장

 

1886년 빈에 새로 들어선 국립극장과 미술사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려 1888년에 등장하는 한사람 한사람의 세밀한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 넣어 보는 이들을 경탄케 한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을 완성하여 황제에게 특별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았다. 이때 건축 장식미술의 대가로 자리를 굳혔다.

 

▲타오르미나의 극장 (1886~1888)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400x750cm / 부르크 극장 소장

 

▲세이렌 (1889)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52x82cm / 첸트랄슈파르카세 소장

 

▲사포 (1888~1890)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31.6x39cm / 빈 역사박물관 소장

 

▲Judith II, 1909, Oil on canvas, 178 x 46 cm, Galleria d'Arte Moderne, Venice

 

▲Death and Life, 1916

Oil on canvas, 178 x 198 cm, Private collection, Vienna

 

▲Portrat der Eugenia (Mada) Primavesi 1912

 

▲Portrait of Sonja Knips ,1898
Oil on canvas, 57 x 57 inches (145 x 145 cm), sterreichische Galerie, Vienna, Austria

 

▲The Kiss, 1907-08

Oil and gold on canvas, 180 x 180 cm, Osterreichische Galerie, Vienna

 

▲Baby(Cradle 1917-1918

 

에밀리 플뢰게 초상(Portrat der Emilie Flogeö) 1902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181x84cm / 빈 미술관 카를스플라츠 소장

 

▲Entwurf für den Wandfries im Palais Stoclet in Brüssel, Detail: Die Umarmung

1905-1909

 

▲Weg im Park von Schloß Kammer 1912

 

▲금붕어 (1901~1902)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181x66.5cm / 개인 소장

 

▲히기에이아 (<의학>의 부분)

(Hygieia(detail from Medicine, 1900~1907))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소실

 

▲베토벤 프리즈, 빈 제체시온의 벽화 (1902)

유화 / 벽화 /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온 세계에 보내는 입맞춤 (베토벤 프리즈의 일부)

(Here's a Kiss to the Whole World! (detail of the Beethoven Frieze, 1902))

벽화 / 프레스코화 / 216x300cm /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기사 (베토벤 프리즈의 일부)

(The Knight(detail of the Beethoven Frieze, 1902))

벽화 / 프레스코화 /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희망 (1903)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67x181cm / 캐나다 국립미술관 소장

 

▲커다란 포플러, 또는 다가오는 뇌우 (1903)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100x100cm / 레오폴드 미술관 소장

 

▲물뱀 I (1904~1907)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50x20cm /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헤르미네 갈리아의 초상 (Portrait of Hermine Gallia, 1904)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170.5x96.5cm /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마르가레트 스톤보로-비트겐슈타인의 초상 (1905)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90x180cm /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소장

 

▲여성의 세시기 (1905)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178x198cm / 로마 현대미술 갤러리 소장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1907

 

▲구스타프 크림트(Gustav Klimt)

Portrait of Eugenia Primavesi

1913

 

▲구스타브 크림트(Gustav Klimt)

Clara Klimt 1880

 

▲Portrait of Baroness Elizabeth Bachofen-Echt 1914

 

Portrait of Mada Primavesi 1912

 

Portrait of a Lady (Frau Heymann) 1894

 

Portrait of Marie Breunig 1894

 

Portrait of Hermine Gallia 1904

 

Portrait of Amalie Zuckerkandl 1918

 

생명의 나무 (Tree of Life, 1905년경~1909년경)
수채화 / 템페라와 수채 / 194.5x120.3cm / 오스트리아 응용미술관 소장

 

성취 (Fulfilment, 1905년경~1909년경)
수채화 / 템페라와 수채 / 194.5x120.3cm / 오스트리아 응용미술관 소장

 

꽃이 있는 농장 정원 (Farm Garden with Flowers, 1906년경)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110x110cm /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907)

유화 / 138x138cm / 노이에 갤러리 소장

 

다나에 (Danae, 1907~1908)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77x83cm / 개인 소장

 

희망 II (Hope II, 1907~1908)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110x110cm / 피셔 파인아트사 소장

 

키스 (The Kiss, 1907~1908)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180x180cm /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꽃이 흩뿌려진 작은 초원 위에 서 있는 두 연인은 주변과 분리되어 그들을 마치 후광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빛 아우라 안에서 서로에게 황홀히 취해 있다. 이 공간이 어디인지, 또 시간은 언제인지 말해주는 단서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마치 우주와 같은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보다 완전하고도 유일한 경험을 맛보고 있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우의화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는 역시 사랑하는 연인들이 등장하는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1902)와 <스토클레 프리즈(the Stoclet Frieze)>(1905-09) 같은 그의 초기 대표작들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한 아우라와 매혹적인 아름다움은 에로틱한 기쁨의 결정체로서의 연인들에 대한 묘사뿐 아니라 황금빛을 사용한 것에서 비롯한다. <키스>는 클림트가 실제 금박과 금색 물감을 자주 사용하였던 1907-1908년의 이른바 ‘황금 시기(golden period)’의 대표작들 가운데 하나이다.

 

황금 시기 작품들의 중요한 특징은 ‘금’에 내재된 마술적 혹은 종교적인 함축성뿐 아니라 절대적인 부와 물질 가치의 상징성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화면의 두드러진 장식적인 구조 덕분에 작품의 내용보다는 그 형태나 물질의 측면에서 그 의미가 쉽게 다가오기도 한다.

 

모자와 깃털 목도리를 한 여인 (1909)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55x69cm /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유디트 II (살로메) (Judith II (Salome, 1909)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178x46cm / 카 페사로 현대미술갤러리 소장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관능적인 여성의 육체를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1897년 빈 분리파’를 결성하여 반(反) 아카데미즘 운동을 하다.1906년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을 결성하여 전시 활동을 시작하였다.빈 아르누보 운동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미술가 중 하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비엔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구스타프 클림트. 그의 아버지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아 출신의 동판조각사이자 금세공사였고, 모친인 안나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다고 한다. 구스타프는 아들 셋, 딸 넷 중 장남이었는데,

 

그의 바로 아랫 동생인 에른스트는 28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형을 도와 미술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구스타프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8세 때 양친을 따라 비엔나로 이주하여 동판 조각사가 되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은 탓인지 워낙 다혈질이었던 탓이었는지 평소에는 친절하고 다정했으나 종종 격노하여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클림트는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때인데도 집에 빵 한 조각 없었다."는 여동생의 회고처럼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장녀와 막내딸을 잃은 양친은 남은 다섯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 잘 길러보려 했지만 장남인 구스타프를 짐나지움(독일계 학제에서 짐나지움은 우리식으로 하자면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에 입학시키지 못하고 공장 노동자나 장인의 삶이 예정된 고등공민학교인 '뷔르거'슐레(슐레는 실업계 직업교육학교)에 입학시킨다.

 

이토록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1876년 '비엔나 장식미술학교'전문적인 미술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와 같이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자신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주목을 받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며 링 거리의 교회 창문 디자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칼스바트 온천장의 천장화, 라이헨헤브크 국립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문받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가 비엔나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화가로서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무렵의 그는 관습적인 주제를 아카데믹한 양식으로 그리는 벽화가였다.그는 동생 에른스트, 마츠와 함께 '쿤스틀러 콩파니'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이때 구스타프 클림트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립극장 장식, 피우메의 리예카 국립극장 장식,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대계단 장식 등을 함께 해나갔다. 1890년에는 비엔나 구(舊)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으로 그해 처음 제정된 "황제 대상'의 수상자가 되는 등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1892년 그에게 있어 둘도 없는 예술적 동반자이자 동지였던 동생 에른스크가 젊은 나이에 뇌일혈로 사망하고, 그 얼마 뒤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에른스트 마저 뇌일혈로 사망하고 만다.

 

아직 한창 젊음을 구가해야 할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만든다. 그의 작품 속에서 삶과 죽음의 이미지가 늘 공존하는 까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