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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교황청ㅡ교황권(敎皇權)ㅡ3세기 기독교 확산하며 커져…한때 황제도 무릎 꿇었죠

by 삼수갑산 2022. 7. 14.

교황권(敎皇權)ㅡ3세기 기독교 확산하며 커져…한때 황제도 무릎 꿇었죠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일(현지 시각) “현재 유엔(UN)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을 해결할 힘이 없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어요. 국제 전쟁이나 분쟁을 해결할 만한 실질 권한이 없는 국제기구 한계를 지적한 건데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교황이 해서 더 의미가 새롭게 보이는 건 과거엔 교황이 유럽 국가 간 분쟁을 조율하거나 심판하는 등 역할을 담당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①기독교의 확산으로 교황은 황제권을 수여하는 권한까지 갖게 됐어요. 지금의 북부 이탈리아와 독일 지방까지 통치하게 된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800년 성탄절에 피에트로 대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는 모습을 그린 그림. ②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1077년 1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사죄하는 모습. 이를‘카노사의 굴욕’이라고 불러요. ③교황이 묵인하던 면죄부 판매를 지적한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 /위키피디아

 

◇교황은 聖人 베드로 후계자

 

교황(敎皇)은 라틴어로 ‘파파(papa)’라고 해요. 이 말은 원래 ‘아버지’를 의미했지만, 서방 교회에서 각 교회 공동체의 장(長), 특히 수도원장과 대주교를 ‘파파스’라고 불렀어요. 그러면서 ‘공경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게 됐죠.

교황의 탄생은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는 과정과 관련이 있어요.

 

기원 후 1세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본받고 인류애에 바탕을 둔 기독교가 창시됐어요. 로마 제국은 외래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이었으나, 기독교가 다신교(多神敎)를 부정하고 황제 숭배도 거부하자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죠. 2세기 말 정치·사회적 위협을 겪던 기독교인들은 수장(首長)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에 로마 교구 교구장을 예수 12제자 중 대표 지도자 격이던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교황(敎皇)으로 삼고 서방 교회를 총괄하게 합니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보는 의견도 있어요.

 

박해받던 기독교는 3세기를 거치며 로마인 중 10%가 믿을 정도로 세력을 넓혔어요. 이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결국 기독교를 공인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92년 기독교를 로마 제국 국교로 삼기에 이르지요.

 

황제 주도로 기독교 공동체에 막대한 재정적 지원이 이뤄지고, 로마와 예루살렘 등지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어요. 독실한 로마 귀족들은 교회에 자기 재산을 기부했고 교회가 부유해지자 교황 권세도 점차 높아지게 됩니다.

 

◇황제권 수여 권한까지 가져

 

교황권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눠진 뒤 더 높아집니다. 이때 ‘교황령(敎皇領)’도 등장하는데요. 교황령은 교황이 세속적인 지배력을 갖는 지역을 뜻해요. 현재는 바티칸 시국으로 작아졌지만 한때 이탈리아 중부를 거의 아우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르만족 침략으로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구심점을 잃은 서유럽은 여러 나라로 분열했어요. 이런 혼란 속에서 동로마 제국 영역에 있었던 로마 교구 교황 스테파노 2세는 게르만족 중 한 갈래인 롬바르드족에게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러자 서로마 땅에 세워진 또 다른 게르만족 나라인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교황을 통해 왕권 정통성을 인정받고 싶어했던 피핀 3세는 교황을 도와 롬바르드족으로부터 중부 이탈리아 지역을 빼앗은 다음, 교황에게 땅을 헌납합니다. 이게 교황령의 시초입니다.

 

이후 교황은 황제권을 수여하는 권한까지 가집니다. 피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샤를마뉴는 롬바르드 왕국을 무너뜨리고 지금 북부 이탈리아, 독일 지방까지 통치하게 됩니다.

 

그러다 800년 성탄절에 피에트로 대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 관을 받으며 대제(大帝)의 칭호를 얻어요. 교회라는 거대 조직을 가진 교황에게 지위를 인정받아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한 거예요.

 

황제보다 높았던 교황 권위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카노사의 굴욕’ 사건입니다. 11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회 개혁이란 명분으로 성직자 임명권을 황제로부터 가져오려고 했는데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던 하인리히 4세가 반발하자 그에게 폐위 선고를 내리죠. 이에 황제는 1077년 1월 추운 알프스산을 넘어 교황이 잠시 체류하던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성으로 가 교황에게 사죄해야 했어요.

 

◇십자군 전쟁 거치며 교황권 쇠퇴

 

그러나 교황권은 13세기 십자군 전쟁을 거치며 차츰 쇠퇴하게 됩니다. 원래 이슬람 세력 지배하에 있던 기독교 성지(聖地)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는 목표로 전쟁을 일으켰지만 200년 가까이 이어가면서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고 전쟁을 치르느라 힘이 빠져 교황과 교회 권위가 점점 떨어졌기 때문이죠.

 

교회가 점차 세속화되면서 타락과 부패도 심해졌어요. 중세 말기에는 성직자들이 ‘돈을 내면 죄를 사하여 준다’는 면죄부를 돈 받고 팔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도 높아집니다.

 

이 시기 교황 위신이 추락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1309년 ‘아비뇽의 유수(幽囚·잡아 가두다)’입니다. 로마 교황청이 약 70년간 남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간 사건인데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성직자에게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어요.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반발했지만, 결국 황제 권위에 굴복합니다. 이에 새로 선출된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고, 이후 차례로 6명 프랑스인이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프랑스 왕이 교황청을 자신의 지배 아래 뒀던 시기이지요.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1483~1546)는 1517년 교황이 묵인하고 있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반박문’을 발표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종교 개혁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어요. 종교 개혁가들로부터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 세력이 탄생했고, 이들은 교황 중심 로마 교회에서 이탈하고자 했지요.

 

교황권은 유럽 열강 세력 다툼 속에서 더욱 쇠퇴합니다. 유럽 절대 군주들은 이제 교황의 종교적 우위권을 거부했어요.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교황청 총리를 살해하고, 교황 비오 9세가 몰래 로마를 빠져나오는 일도 일어납니다.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시가 주권을 가진 독립 국가로 인정된 건 1929년입니다. 교황이 정치적 현안에 휩싸이지 않고 본연의 종교적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탈리아 정부와 바티칸 사이에 ‘라테라노 조약’이 맺어졌어요.

 

오늘날까지 교황은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인식되면서, 교황은 세계 정치와 외교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주고 있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 교황 비오 11세는 “나치주의와 공산주의를 단죄해야 한다”고 공표하기도 했지요.

 

◆교황 선출 ‘콘클라베’

 

추기경들이 모여 교황을 선출하는 회의를 ‘콘클라베’(Conclave)라고 해요. ‘열쇠로 걸어 잠글 수 있는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지요. 추기경들은 밀폐된 장소에 머무르며 교황을 선출해요. 역사상 가장 길게 이어진 콘클라베는 1268년으로 3년이나 끌었다고 하는데요.

 

이 결과 교황으로 선출된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는 1274년 콘클라베 규정을 엄격하게 제도화했어요. 사흘이 지나도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면 저녁 식사에서 한 가지 요리밖에 먹을 수 없고, 닷새가 지나도 성과가 없으면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빵과 와인, 물만 제공됐다고 하네요.

 

출처 / chosun. com / 정효진 양영디지털고 역사 교사 / 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