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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ㅡ스파르타(Sparta)ㅡ초라한 스파르타 유적…전쟁은 이겼지만 역사에선 졌다

by 삼수갑산 2022. 8. 18.

그리스 스파르타(Sparta)

초라한 스파르타 유적…전쟁은 이겼지만 역사에선 졌다

◈아테네를 꺾고도 쇠락한 스파르타

유적지 폐허 수준… 10분이면 돌아 - 올리브 나무 무성, 찾는 이 적어
아테네와 쌍벽 이뤘었는데 박물관은 작고 유물도 별로 없어

모든 남자는 군인이 된 군사국가 - 노예 통제 위해 군사력 키워
7세~30세까지 공동 막사 생활… 페르시아 지원 받아 아테네 꺾어

패권 공납금 2배 올려 반발 확산 - 우방이었던 폴리스들도 반란
몰락한 뒤 남자들은 용병 전락… 아테네는 패전 10년만에 부활

 

▲스파르타는 한때 아테네와 더불어 그리스 세계를 대표하는 폴리스였지만 오늘날은 인구 2만 명도 안 되는 작은 지방도시에 불과하다. 중앙광장을 장식하고 있는 ‘스파르타의 영웅’이란 제목의 동상은 용맹한 스파르타 전사와는 어울리지 않게 왜소하고 거대한 방패를 들 힘조차 없어 무릎을 꿇고 있다. 옛 동상의 오른손에는 장난감처럼 생긴 칼이 들려 있었으나 그마저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힘에만 의존하다 그 힘을 잃었을 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스파르타의 역사를 상징하는 듯하다. /서경석 사진작가

 

승리를 위해 그리스의 자유를 팔다

스파르타의 명성은 페르시아 전쟁 때 절정에 달했다. 페르시아의 대왕 크세르크세스가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스파르타는 용감하고 명예롭게 싸웠다. 레오니다스 왕은 300명의 특공대와 함께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장렬히 전사했다(기원전 480년). 다음해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결정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스파르타 전사들의 맹활약 때문이었다.

 

아테네가 살라미스와 미켈레 해전을 이끌며 바다를 지켰다면, 육지를 수호한 건 스파르타였다. 결국 두 도시가 힘을 합쳐 그리스의 자유를 지켜낸 것이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본토에서 물러났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게해를 되찾아와야 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해안가와 섬에 있는 폴리스들은 동맹을 만들어 함께 싸웠다.

 

육지 국가인 스파르타는 전쟁에서 손을 뗐다. 그 결과 에게해에서 페르시아를 몰아내고 대신 주인이 된 아테네는 부유하고 강력한 해양 제국으로 거듭났다. 민주주의라는 낯선 체제와 바다라는 다른 공간을 토대로 한 아테네의 부상은 스파르타를 불편하고 불안하게 했다.

 

어제의 전우는 점차 오늘의 적으로 변해갔다. 전쟁은 불가피했다(기원전 431년).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자유'를 기치로 내걸었다. 페르시아에 대항해 여러 나라가 함께 싸워 쟁취한 자유를 빼앗아간 아테네를 응징하고, 델로스 동맹에 속박된 폴리스들에 자유를 되찾아주겠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응징할 수 없었다. 바다를 장악한 해군, 아테네와 항구를 둘러싼 성벽, 전쟁 자금과 물자를 제공하는 제국을 가진 아테네는 예전과는 다른 차원의 폴리스로 발전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해군이 필요했고, 해군을 건설하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지적했듯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빈털터리'인 스파르타에 그런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스파르타는 돈을 구하기 위해 페르시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대가로 전쟁에서 승리한 후, 에게해 주변 폴리스들을 페르시아에 넘기기로 비밀리에 약속했다.

 

승리를 위해,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그리스의 자유'를 페르시아에 팔아넘긴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해군이 바다에서 아테네 해군을 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페르시아에서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황금이 없었다면 스파르타는 절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아테네가 시칠리아 원정 실패와 쿠데타로 힘이 많이 약해지고, 리산드로스라는 탁월한 장군이 해군사령관을 맡고 나서야 스파르타는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그리스 남쪽 끝에 있다. 스파르타는 그 반도에서도 남쪽이니 그리스의 중심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셈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부와 동부는 대부분 산악 지대다. 아테네에서 들어가려면 험준한 파르논 산맥을 넘어야 한다. 고갯길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맞은편으로 타이게투스 산맥이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스파르타는 이 두 산맥 사이 좁은 평야에 있다. 인구가 2만명에도 못 미치는 작은 지방 도시다. 한때 아테네와 더불어 그리스 세계의 쌍벽을 이뤘던 폴리스란 사실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오늘의 스파르타는 쇠락해있다. 시내 중심부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 규모와 그 안에 소장된 유물 수준은 아테네와 비교하면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눈길이 가는 유물도 딱히 없다. 고대 유적지도 참담하기는 마찬가지다. 외진 주택가와 붙어 있는 고대 유적지는 폐허에 가깝다. 8년 전 처음 방문했을 때는 입장표를 파는 곳도 없었고, 관리인도 찾을 수 없었다. 버려진 스파르타의 옛터에는 올리브 나무만이 무성했다.

 

작년에 가보니 입구에 작은 매표소도 생겼고, 그럴듯한 울타리도 쳐져 있었다. 그러나 올리브 나무만 무성한 폐허란 사실은 변함없었다. 찾는 이도 역시 거의 없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한때는 동지로 또 한때는 적으로 함께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만들었던 두 도시의 간극이 너무나 넓고 깊다. 스파르타는 왜 이렇게 몰락해버린 것일까?

▶이웃을 정복하고 노예로 삼다

스파르타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폴리스였다. 감히 쳐들어올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을 쌓지 않은 유일한 폴리스였다. 그렇게 강한 폴리스를 만들기 위해 스파르타는 엄격하게 구성원들의 삶을 통제했다. 시민에게는 직업 선택 자유가 없었다. 직업은 딱 하나, 군인뿐이었다.

 

남자 아이들은 일곱 살 때 집을 떠나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공동 막사에서 생활했다. 매일 함께 육체를 단련했고, 군사 훈련을 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용맹, 규율, 명예, 복종과 같은 스파르타의 가치를 익혔다. 정치적 자유도 제한됐다. 시민 모임인 민회는 형식적 기구에 불과했고, 두 왕과 소수 엘리트가 권력을 독점했다.

 

스파르타 사회가 이렇게 엄격한 군사 중심의 과두제 국가가 된 건 식민지와 노예 때문이었다. 폴리스는 대부분 8세기를 전후해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활발하게 해외로 나아가 식민지를 개척했다.

 

오직 스파르타만이 해외로 나가는 대신 타이게투스 산맥을 넘어가 풍요로운 이웃 메세니아를 정복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기원전 7~8세기). 메세니아인 수가 스파르타인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통제하려면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했다. 스파르타의 모든 시민은 그렇게 군인이 됐다.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옛 스파르타의 고고학 유적지에 서면 험준한 타이게투스 산맥을 배경으로 현대 스파르타 시의 도심이 보인다. 사진 속의 토대뿐인 극장 터가 그나마 고고학 유적지에서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서경석 사진작가

▶테베에 패하며 역사에서 사라지다

스파르타는 거추장스러운 대의명분을 내팽개치고 페르시아와 한 약속을 지켰다. 아테네가 사라졌으니 어차피 스파르타의 패권에 도전할 국가도 없었다. 페르시아와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부와 권력을 빼앗아 나눠 갖고, 그리스 세계 위에 힘으로 군림했다.

 

스파르타같이 폐쇄적이고 군국적인 나라가 약속한 자유를 믿은 어리석음의 대가는 참혹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 세계의 민주 정부를 하나씩 쓰러트리기 시작했고, 전략적 요충지에는 군대를 배치했으며, 패권국가에 바치는 공납금의 규모를 아테네 때보다 배로 올렸다.

 

검박하게 살다 돈 맛을 본 스파르타인들의 탐욕은 절제를 몰랐다. 폭력과 착취를 견디다 못한 폴리스들은 반(反)스파르타 동맹을 결성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의 한결같은 우방이었던 테베가 선봉에 섰다. 군사 천재 에파미논다스의 지휘 하에 테베와 그의 동맹들은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 군대를 궤멸했다(기원전 371년).

 

에파미논다스는 메세니아를 독립시키고, 노예들을 해방해 스파르타의 물적 토대를 완전히 파괴해버림으로써 자신의 천재성을 다시 입증했다. 아테네처럼 개방적 사회와 고결한 문화를 창조해 본 적도 없고, 교역과 생산으로 부(富)를 창출해본 적도 없는 스파르타가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싸움뿐이었다.

 

스파르타의 남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용병으로 이 나라 저 나라 팔려가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한 채 역사에서 잊혔다. 반면에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란 파멸적인 장기전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과 10년 만에 부활에 성공했다. 그 후 2400년 가까운 긴 세월의 부침에도 아테네는 언제나 그리스 문명의 중심이었고, 오늘은 그리스 수도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수많은 사람으로 언제나 붐빈다. 스파르타의 유적지는 대조적으로 올리브 나무만 무성하다. 옛 명성은 덧없고, 옛 터전은 처량하다. 무엇이 두 폴리스의 운명을 갈랐던 것일까? 지금도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 목표는 천차만별이다. 세월이 흐른 후에야 남는 자와 사라진 자, 추앙받는 국가와 조롱받는 국가, 기억되는 문명과 잊힌 문명으로 갈릴 것이다. 누가 궁극적 승자로 기억될까? 굳이 그 답을 찾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스파르타의 역사를 통해 이미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남자들 병영 생활로 부부 함께 생활 못해… 인구 감소도 몰락 원인

 

스파르타가 몰락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유는 인구 감소였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 때 스파르타는 중장보병 5000명을 파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371년 테베와 레욱트라에서 싸울 때는 중장보병 2000명 정도밖에 동원할 수 없었다.

 

기원전 5세기의 대지진, 노예 반란, 전쟁으로 인해 성인 남성 수가 급격하게 줄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에서는 남자들이 한창 나이에 병영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부부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별로 없어 출산율이 낮았다.

 

폐쇄적 사회라 이민을 받아들이거나 거류 외국인에게 시민권을 주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기원전 331년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대패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스파르타를 향해 '쥐들의 전투'라며 경멸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게 사자는 쥐가 되어 사라졌다.

출처 / chosun.com / 송동훈 문명 탐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