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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전라 북도****기행

전북 전주ㅡ한국 천주교 성당ㅡ전주 완산구 풍남문 전동 성당

by 삼수갑산 2021. 11. 14.

한국 천주교 성당ㅡ전주 완산구 풍남문 전동 성당

▲전동성당

 

전동 성당이 자리잡고 있는 이 곳 "전주 풍남문 밖" 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박해의 칼날 아래 참수형을 당한 최초의 순교터며, 또한 신유박해 때 호남의 사도인 유항검과 초기 전라도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순교한 거룩한 땅이다.

 

따라서 백 년의 전통을 간직한 순교 일번지로서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으로 동양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전동성당은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된 전교의 발상지이다.

 

▲대승리(전동 성당 발상지)

 

천호 사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대승리는 전주 지역 선교의 요람인 전동 성당이 세워지기 전 복음의 씨앗이 움튼 곳이다.훗날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크고 아름다운 전동 성당을 세우기 전,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보두네(Baudounet,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859-1915년) 신부가 1889년 봄부터 1891년 6월 23일까지 2년여 간 이곳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무명 순교자들의 묘가 있어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천호 사적지에서 17번 국도를 타고 소양교를 건너 좌회전을 하면 26번 국도가 나온다. 동양 초등 학교에서 다시 좌회전해 2킬로미터 남짓, '야생가든'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여기서600미터 정도 가면 소박한 모양의 집이 한 채 보인다.

 

바로 이곳이 보두네 신부가 사목을 하던 자리이다. 집 옆에는 전동 성당 설립 1백주년을 맞아 세운 기념비가 눈에 띈다. 비문에는 이곳 대승리의 역사와 부지를 매입하게 된 경위가 간단하게 적혀 있어 찾는 이들의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집 뒤편으로는 대나무숲이 울창해 보두네 신부와 당시 신앙의 선조들이 지녔던 대쪽같이 굳건한 신앙을 전해 주고 있는 듯하다. 보두네 신부가 고국을 떠나 머나먼 이국, 조선에 첫발을 디딘 것은 1885년 8월이었다.

 

불과 1년 전인 1884년 9월 사제품을 받고 불 같은 신앙으로 고행의 길을 떠나온 그는 입국 후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로 갔다가 마침내 전라도 지방까지 발길을 옮겼다. 입국한 지 무려 10년이 지나서야 조선에서 박해가 멎어 비로소 그는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를선교의 요지로 선정할 수 있었다. 그 때가 바로 1891년으로서 보두네 신부는 그 이전 2년 동안 대승리에서 사목을 했던 것이다.

 

1894년 동학란을 피해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임지로 내려온 그는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키로 하고 가지고 있던 말까지 모두 팔아 성당 건립에 충당했다. 전동 성당이 지금까지 사람들로부터 감탄의 눈길을 받는 것은 그 건축물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보두네 신부와 선조들이 쏟았던 정성에 기인하는 듯하다.

 

▲전동성당

 

1889년 봄, 전동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보두네(프랑스 선교사) 신부가 임명되고 본당이 설립되었으나

전주는 당시 개항지가 아니었고 전주 감영이 위치하고 있어 보두네 신부는

전주에 곧바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주 근교인 대승리(완주군 소양면)에 머물면서 전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100주년이 되던 1891년 봄에야 현재의 자리에 본당의 터전을

마련하고, 전교를 시작하여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되었다.

 

▲전동 성당 앞마당에 설치된 성당 안내석, 예수성심상 아래에 책 형태로 만들어졌다

 

▲전동성당

 

전동성당은 1908년 보두네 신부가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914년에야 우여곡절 끝에 외형 공사를 마쳤다. 성당 건립의 공사 청부는 중국인이 맡았다. 중국인 인부 100여 명이 벽돌을 직접 구워서 썼고, 주춧돌은 1909년 7월 전주부의 허가를 얻어 남문밖 성벽의 돌을 가져다 썼다.

 

이로써 1791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현장을, 또 1801년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동료 순교자들의 능지처참과 참수를 지켜보았던 그 성곽의 돌들이 하느님 성전 건립의 주춧돌로 사용된 것이다. 그 기적의 땅에 순교한 지 100년 만에 초대 주임신부인 보두네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선혈이 어린 성곽의 돌로 주춧돌을 세워 23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전동성당 완공은 보두네 신부가 목숨을 걸고 온 힘을 다 바쳐 노력한 결과였다. 그 후 모든 시설을 완비하고 축성식을 가진 것은 1931년으로, 완공하기까지 23년이 걸린 대역사였다. 성당 건물은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동서양의 융합된 모습이어서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1937년 한국 교회 최초의 자치교구로 전주 교구가 설정되고 전동성당은 주교좌 성당(1937~1957)이 되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인민군이 이 성당을 점령하여 전라북도 인민위원회 및 차량 정비소와 보급 창고로 사용하기도 했다.

 

1980년 중반 이후에는 전라북도 지역 내에서 '민주화의 성지'로 도민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지지를 받았다. 그러던 중, 1988년 10월 10일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본당 설립 100주년(1989년)을 맞아 기념사업과 함께 성전 보수를 시작하여 1992년에 보수 공사를 마쳤다.

 

▲전동성당 돔 지붕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작은 종탑들은 조화로운 입체감을 창출,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 준다. 종머리는 로마네스크의 주조(主調)에 비잔틴풍(風)이 가미되어 있어 건물 본체와 잘 어울린다.1988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

 

▼옛 순교자 스테인드글라스(2009년 이전

 

▲윤지헌 프란치스코 (1764-1801년) , 이순이, 2007년 스테인드글라스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는 1764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과 논산군 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이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바오로)은 그의 형이다. 프란치스코는 1789년에 형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에 앞서 윤지충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되어 인척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고 오랫동안 그 내용을 탐독한 끝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1787년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윤지충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아우 프란치스코와 함께 열심히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갔다.

 

1791년에 형이 순교하자 프란치스코는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진산을 떠나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을 베껴 읽으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고, 자신의 이름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키곤 하였다.

 

또 1795년에는 저구리를 방문한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았으며, 이후에는 교회의 밀사 황심(토마스)을 북경에 파견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교회 활동이 관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혔으며,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이미 드러난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다음과 같이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천주교 교리를 끊지 못하였고, 고질병처럼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오로지 만 번 죽겠다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천당 지옥의 이치를 굳게 믿은 탓에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시 박해자들은 교회 밀사가 북경을 왕래한 이유를 알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조정의 명에 따라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후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으며,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에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고산에 갇혀 있던 아내와 가족들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순교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

 

1754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다음해에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그의 조카이다.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었다.

 

그는 권일신의 집에서 주요 교리를 배우는 동안 이를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이제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다. 1786년 봄에 이승훈을 비롯하여 지도층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하였을 때, 아우구스티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지도층 신자들은 이때부터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몰두하였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789년 말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북경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헌납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아우구스티노는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이종사촌 윤지충(바오로)이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된 후, 일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는 석방되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아우구스티노는 아우 유관검을 신부에게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하였다.

 

그때 마침 조정에서 신부 체포령을 내리자, 주 신부는 이를 피해 지방 순회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주 아우구스티노의 집을 방문하여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아우구스티노가 앞장서서 이 계획을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오랫동안 결실을 맺지 못하였고, 그러던 차에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에 앞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장남 유중철과 이윤하(마태오)의 딸 이순이가 동정 부부 서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박해자들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로 아우구스티노를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그는 결코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결국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아우구스티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성 다블뤼(St. 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훗날 그가 배교한 것 같다는 추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항검이 배교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부정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1759-1791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우용’이고,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은 그의 아우이다. 본래 총명한 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또 이 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다음 해부터는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그는 1787년 인척인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후 바오로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이종 사촌 권상연(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자주 왕래하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바오로는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어머니(즉 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윤지충 바오로가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얼마 안되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그곳을 온통 소란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들은 바오로는 충청도 광천으로,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바오로와 권상연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우선 전라 감사는 그들로부터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얻어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았다.

 

특히 바오로는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였고, 이에 화가 난 감사는 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바오로와 권상연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그들로부터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내 조정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결국 임금은 이러한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처형을 윤허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즉시 바오로와 권상연을 옥에서 끌어내 전주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이때 바오로는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을 하였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바오로와 권상연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의 피에 적셨으며, 그중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죽어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순교자 권상연 야고보 (1751-1791년)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 사촌 윤지충(바오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이후 야고보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고모(즉 윤지충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는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신주와 같은 나뭇조각을 공경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무익한 일이며, 이를 금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어기기보다는 차라리 형벌과 죽음을 택하겠다.” 야고보와 윤지충이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친척을 통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그러한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그곳을 온통 소란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그들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들은 야고보는 충청도 한산으로,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각각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 감영에 도착한 야고보와 윤지충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그들로부터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내 조정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고, ‘권상연과 윤지충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결국 임금은 이러한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처형을 윤허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즉시 야고보와 윤지충을 옥에서 끌어내 형장으로 정해진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야고보는 이때 초죽음이 된 상태였으면서도 이따금씩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형장에 이르자, 윤지충이 먼저 칼날을 받았다. 이어 야고보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때는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야고보와 윤지충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의 피에 적셨으며, 그중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죽어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출입문 안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