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산 순교자 성지(관악구 신림동 호암로)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명의 성직자가 안장되었던 곳)
▲2012.10.14일 서울대교구장 염수정(안드레아) 대주교가 축성한 표지석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교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 중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 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데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 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찾아가는 길
▲순교성지 입구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의 유해가 1836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묘자리이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앞날을 예고하듯 세 분의 순교 성인이 묻힘으로써 명실공히 삼성산(三聖山)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삼성산이라는 명칭은 신라 때의 명승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尹弼) 등 3명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과 고려 말기에 불교계를 이끌던 나옹(懶翁-1320∼1376), 무학(無學-1327∼1405)과 인도승려 지공(指空-?∼1363) 스님 등이 이곳 삼성산에 올라가 각기 자리를 잡고 수도, 전진했다는 연고로 삼성산(三聖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성지 입구 표지석
▲삼성산 성령수녀원, 청소년 수련관, 피정의집
▲예수성심상
▲두번째 표지석
서울대교구 삼성산 성지의 두 번째 표지석이다.
초입에 설치된 표지석 조금 위에 있는 삼성산 성령 수녀원 정문 바로 앞에 설치된 표지석으로,
이곳에서부터 산길을 약 7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성지가 나온다.
이 표지석 또한 삼성산 본당 설립 2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2012년 10월 12일 설치 · 축성한 것이다
▲약수터에서 성지로 오르는 표지석
▲성지 전경, 뒷쪽으로 성지가 보인다
▲성지 제대 옆 표지석
▲표지석 후면
▲삼성산 순교자 성지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교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 중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 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데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 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 Guide for International Pilgrims
◆ Samseongsan Martyrs' Shrine
The Samseongsan Shrine is a historic site where the relics of three Catholic priests- St Imbert, who served as the second bishop of the Korean Diocese, Father Maubant and Father Chastan-lay for 58 years were martyred during the period of persecution in the Gihae Year 1839.
When the further persecution of the Korean Catholics started in 1839, these three priests delivered themselves to the authority to prevent or decrease the sacrifice of the Catholic community in Korea, and confessed their faith in Catholicism, before being executed at Saenamteo on September 21, 1839.
◆ 三圣山 圣地
三圣山 圣地 己亥迫害(1839)年时期受 "军门枭首之刑" 而殉教的朝鮮第二任教区长Imbert主教,Maubant和Chastan神父的遗骸五十八年的安置之处。己亥迫害(1839年)爆发后,三名圣职人员为了減少教友们的牺牲, 自觉的前往官衙自首。直到1839年9月21日在沙南基被处以死刑。
◆ サムソンサン(三聖山)聖地
三聖山聖地は己亥迫害(1839))時、軍門絞首の刑に処せられて殉教した朝鮮第2代教区長 聖Imbert司教、Maubant神父とChastan神父の遺体が58年間、安置されていた場所である。己亥迫害時3名の聖職者は、信徒たちがそれ以上犠牲にならないよう、官衙に出頭して信仰を告白した。これにより3人はセナム卜において、死刑に処せられた。
▲야외 미사처
▲야외 미사처
▲성인 묘 자리
▲성인 묘 자리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의 유해가 1836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묘자리이다.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38년 전, 주문모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 끝에 이슬이 되고 만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힌다.
교우들이 유해를 거두고자 애쓴 지 나흘째 되는 날 세 명의 교우가 시체를 훔쳐 내려다
그중 한명이 붙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 후 스무 날 가량 지난 뒤 7-8명의 교우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교우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老姑山)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파수를 피해 유해를 훔쳐 낸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한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순교하게 되니 1868년 3월 절두산에서의 일이다.
이 때 가까스로 화를 면한 박순집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이 묘소를 고증해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산 증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순교한 가족들의 시신을 찾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 신부
등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내 용산 왜고개에 이장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4년간 박순집의 가문은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자신은
1982년 82세를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인천 교회의 창설에 여생을 바쳤다.
16세 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우리 나라 최초의 수녀가 된 박 사베리오(1872-1966년)는
박순집의 막내딸이기도 하다.
한편 박순집 일가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삼성산에 1834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묻혀 있던
세 성직자는 1925년7월 25일 시복되었다.
▲1984년 축성기념비
▲성인 묘자리
▲성인 묘자리
▲성모 상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
■ 순교자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주교(1796∼1839)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며 주교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 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 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모방, 정 샤스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 교회 설립 53년 만에 비로소 선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1839년 초 신자 수는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사제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 닥친 박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나, 정 두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 성 나 베드로 모방(Maubant)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 성 정 야고보 샤스탕(Chastan)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외방전교회 사제가 된 정 샤스탕 신부는 1836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성 라우렌시오 앙베르 범주교 묘자리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묘자리
▲성 야고보 샤스당 정신부 묘자리
▲순교자 3 성인 묘비
1970년 5월 12일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노기남 대주교, 오기선 신부는 이곳에 세 분의 매장지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소형 비석(앞쪽에 있는 작은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또 1981년 9월에는 신림동 본당 교우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본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십자가의 길 1 처
▲십자가의 길 2 처
▲십자가의 길 3 처
▲십자가의 길 4 처
▲십자가의 길 5 처
▲십자가의 길 6 처
▲십자가의 길 7 처
▲십자가의 길 8 처
▲십자가의 길 9 처
▲십자가의 길 10 처
▲십자가의 길 11 처
▲십자가의 길 12 처
▲십자가의 길 13 처
▲십자가의 길 14 처
출처 / blog.daum / su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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