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유럽********국가들/⊙발칸반도*그리스

그리스ㅡ올림피아(Olympia) / 이오안니나(Ioannina)

by 삼수갑산 2022. 9. 26.

그리스ㅡ올림피아(Olympia) / 이오안니나(Ioannina)

전 세계의 스포츠 제전인 올림픽의 발상지 올림피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한적한 산간에 자리잡은조그마한 도시이다. 기원전 10세기에 올림피아는 제우스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고 신들의 성소로고대건축의 걸작들이 밀집한 곳이고 신전 외에도 이곳에선 4년마다 각종 스포츠 경기를 하던 유적이 산재해 있다. 

 

고대 올림피아에서는 기원전 800년 경부터 신앙과 결부된 경기가 정기적으로 신에게 바처져범汎 그리스 세계로부터 많은 참가자가 모여들었다.

 

▲승리의 여신 니케

 

올림피아 성소(聖所)로 가는 마을 도로변에 서 있는 니케의 동상이다.올림피아 팰리스 라는 이름의 작은 호텔 앞에 서 있다.

 

올림피아가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것은 1989년이다. 1875년 그리스와 독일 정부사이에 발굴에 관한의정서가 교환되어 지금까지 독일 고고학 연구소가 발굴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제1회 경기 대회가 개최 된것은 기원전 776년이었으며 고대 올림픽 경기가 언제, 어떤 이유로 폐지 되었는지는밝혀지지 않았으나 6세기에 이곳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성역의 건물들이 파괴된 것도 원인의 하나로 추정된다.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필립페이온(Philippeion : BC 4세기 말)

 

필립페이온이라는 이름의 이오니아 양식의 이 원형 건물은 카에로네아 전투(Battle of Chaeronea: BC 338)에서 승리한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가 세운것이다. 내부에 코린트식의 열주가 있었는데 알렉산더 대왕이 완성한 것이다.

 

이 건물은 헤라신전 동쪽에  신전과 마주하고 있다.(카이로네아 전투는 마케도니아의 필립2세와 그의 아들알렉산더가 아테네, 테베 등 그리스 연합군을 패배시킨 전투이다. 이 전투로 그리스가 평정되고 알렉산더는페르시아 원정길에 오른다

 

올림피아 성소에서 가장 오래된 도리아식 건물이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을 모신 신전으로가로 16개 세로로 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있다(50 X 18.75 m, 높이 7.80 m).원래는 나무기둥이었으나 점차 석재 기둥으로 교체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 휴전 협정 디스크(원반?)가보관되고 있었다고 한다(올림픽 경기중에는 전투를 하지 않는다는 룰이 있었다  이곳이 올림픽 성화를 채화하는 장소이다.

 

▲헤라 신전 앞에서 올림픽 성화를 채화하는 광경

 

▲올림픽 스타디움 입구

 

입구에 남아 있는 아취는 크립테(Krypte)라고 불리는 스타디움 입구 통로 천정의 일부이다.이 통로는 헬레니즘 시대에 건설되었는데, 이 통로는 심판과 선수외에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스타디움의 현재 모습은 고전기期(Classical time)의 모습이다.  돌로 만들어진 출발선에서결승선 까지는 192.27 X 28. 50 m 이다.  경기장 주위 둔덕에 돌로 만든 의자는 없었고심판석은 플래트 폼으로 남아있다(사진 오른편 경기장 중간).

 

경기장은 약 4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스타디움의 어원인 스타디온은 원래 길이의 단위로 지방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올림피아에서는 약 192.3 m 였다.

 

▲ 이곳은 경기장 출발선 뒷쪽 언덕 너머이다.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이곳에 모여 소리치며 응원을 하면

그 소리가 오른편에 있는 메아리 벽에 반향 되었다고 한다.

 

▲제우스 신전(Temple of Zeus : BC 470~457)모형

 

 도리아식 신전의 전형이다. 규모는 64.12 X 12.68 m , 높이 20.25 m 의 크기이다.내부에는 높이 12 m 의 제우스 신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제우스 신전 뒤로 붉은 지붕의 헤라신전,그 오른편으로는 작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데 범汎 그리스 세계에서 도착한 값비싼 봉납품을 모아둔보물 창고들이 작은 신전 같은 모습으로 늘어서 있다.

 

▲제우스 신상

 

제우스 신전 내부에는 황금과 상아로 장식한 제우스 신상이 안치되어 있었다.거대한 제우스 신상은 조각가  페이디아스(Pheidias)의 작품으로 여겨지는데고대 올림픽이 중단된 후에 콘스탄티노풀로 옮겨졌다가 475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고대 7개 불가사의 중에 하나이다.

 

▲제우스 신전의 유적

 

도리아식 신전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맞먹는 규모였다고 한다.현존하는 3층 기단 위에는 앞뒤 6개, 측면에 11개, 총 3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열주랑이 설치되어 있었다높이 10.53 m 의 원기둥 아랫쪽 지름은 2.23 m 였다. 현재는 상징적으로 복원된 한개의 기둥이 서있다.

 

▲제우스 신전터

 

제우스 신전은 올림피아 성역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신들의 아버지'로 숭앙받았던 제우스는전쟁의 신이기도 했다. 현존하는 제우스 신전은  기원전 470년에 건설되기 시작해 14년 후에 완성되었다.제우스 신전은 522년과 551년 두 차례의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레오니다이온(Leonidaion)유적(左) 과 모형(右)

 

거대한 직사각형(75 X 81 m )의 건물로  BC 330년 경에 건축되었으며 공식 숙박시설이다.낙소스(Naxos)의 건축가이며

기증자인 레오니데스(Leonides)의 이름을 붙인것이다.로마시절에는 건물 중앙에 노천 수영장을 만들었다.

 

▲짐나지움(Gymnasium)의 열주들

 

▲짐나지움 주변 모형

 

맨 앞쪽의 넓은 운동장 주변의 열주 회랑과 그 뒷쪽 4각형 건물이 투기장(체육관)이며왼쪽으로 헤라신전과 그 뒤의 제우스 신전이 보인다.

 

▲페이디아스(Pheidias)의 작업장(BC 5 세기 3분기)

 

이곳에서는 주물용 진흙 형틀과 연장이 다수 출토되었다. 5세기에 이 건물은 초기 기독교 교회(바실리카)로 전용되었다.페이디아스는 아테네의 아크로 폴리스 부흥에도 종사한 건축가 겸 조각가인데 제우스 신전 맞은편에이 작업장이 있어 이곳에서 기원전 430~기원전 420년까지 제우스 신상을 제작하였다

 

◆박물관의 유물들

 

사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발굴"에 관한 그리스와 독일 정부 사이의 의정서에 따라올림피아 유적에서 출토된 모든 문화재는 그리스 국내에 머물게 되어 있어서 유적 근처에새로 지은 올림피아 미술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제우스 신전 박공(Pediment)의 조각품들

 

신전 동쪽 박공의 조각품들로 신화를 주제로한 대리석 조각이다.펠롭스(Pelops)와 오이노마오스(Oinomaos)의 컨테스트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제우스 신전의 서쪽 박공의 조각

 

라피츠(Lapiths)와 켄타우로스(Centaurs: 반人반馬)간의 싸움을 주제로한 조각이다.

 

▲헤르메스(Hermes) 와  승리의 여신 니케(Nike)

 

헤르메스 상은 1877년 헤라신전 발굴시 출토되었다. 신들의 메신저인 헤르메스가제우스의 명에 의해 어린 디오니소스(Dionysos)를 그를 양육할 요정에게 맡기려 데려가고 있다.장래 포도주의 신이 될 디오니소스와 연관되어 헤르메스의 오른 팔은포도송이를 들고 있을것으로 추정된다(340~330 BC).

 

▲코린트 식의 청동 투구

 

◆이오안니나(Ioannina)

 

이오안니나는 그리스 북서부 에피로스(Epiros) 주(州)에 위치한 도시이자 주도(州都)이다.주변 도시권의 인구는 10만명에 이르는 대 도시이며 평균 해발 고도 600 m 에 자리잡고 있다.  이오안니나는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450 km  떨어져 있다.

 

▲이오안니나 가는 길

 

이오안니나 인근에는 이오안니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아락타스(Arakhthas)강이 있다.아름다운 사장교를 건너면

이오안니나가 멀지않다.

 

이오안니나 요새는 도시 서쪽 호숫가로 돌출된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4긱형의 성벽에 3면이호수 안으로 들어가 있어 완전한 해자로 배수진을 치고 1면만 도회지와 접해있는 요새이다.

 

▲이오안니나 요새

 

32년(1788~1822)에 걸쳐 이오안니나를 지배했던 터키 행정관 알리 파샤(Ali Pasha)는 주변 일대의 영주들을 제압하고  1788년 이오안니나를 장악하여 프랑스인 건축가를 시켜 현재까지 남아있는 요새를 건축하게 하였다.

 

▲이오안니나 섬 전경

 

호수안의 작은 섬 팜포티스는 푸른 숲과 갈대로 우거지고 한 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몇 채 되지 않는 가옥으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호숫가의 마을

 

▲선착장의 아이들

 

▲마을 어귀 기념품점

 

▲ 마을은 작지만 없는것이 없다.  아담한 정교회 교회가 마을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정교회 내부

 

▲알리 파샤(Ali Pasha) 박물관 앞의 기념품점

 

▲박물관 앞에 서 있는 수령 700년의 고목과 알리 파샤(Ali Pasha : 1741~ 1822)

 

 데살리아(그리스 중북부 마케도니아)에서 에피로스(그리스 북서부 알바니아)지방에 이르기까지실권을 쥐게 된 알리 파샤에 대하여 술탄은 영지의 보유를 정식으로 인정해 주고 1788년에는 "이오안니나의 파샤"라는칭호를 부여해 주었다. 

 

 이후에도 알리는 다른 여러 부족들을 제압하고 영지를 확보하여 술탄으로부터 "아슬란(터키어로 사자란 의미)" 이라 불리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이오안니나의 아슬란" 이라 부르며두려워 했다고 한다. 그는 잔혹하지만 공정하게 통치하였으며 그는 이오안니나를 국제상업도시, 정치, 경제그리고 지식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알리 파샤(Ali Pasha) 박물관 

 

호수 가운데 조그만 섬, 마을 한쪽 끝에 자리잡은 허름한 2층 건물은 보물창고였다.1808년에 마호메트 2세가 즉위하면서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지사들의 영지 소유를 금지 시켰다.그러나 이 명령을 거부한 알리 파샤는 직위 해제를 당하고 그를 응징하기 위해 대 부대가 이오안니나를 포위한다.

 

알리 파샤는 도시에 불을 지르고 은신하다가 1821년 말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을 받고투항했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알리 파샤에 의한 이오안니나의 지배는 32년에 불과했으나1821년 부터 시작된 그리스의 독립운동이 고조된것과 거의 같은 시기라는 점은 의미가 있다.

 

즉  술탄에 대한 알리 파샤의 철저한 저항은 그리스 인들에게 민족의식을 불러 일으켜 터키로부터독립을 쟁취하는데 도화선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이 대포는 여러개 중에 남아있는 단 한개로  1820~1822년 어간에 알리 파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섬을 방어하던 것으로  영국왕이 "에피로스의 사자"에게 보낸 선물이다.이오안니나에는 250여개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박물관의 유물들

 

▲1822년 2월 5일 저격으로 숨을 거두는 알리 파샤 와 유품들

 

알리 파샤의 죽음은 비극이었다. 그는 나이들어 기독교식 결혼을 하였고 모스크를 짓는 대신 많은 교회와민간 건물, 교량을 건설하였으며  영국의 바이런, 독일의 괴테 등 지식인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알리 파샤를 살해한 탄환과 저격한 문 틈새

 

설명문에는 1822년 2월 5일 "알리 파샤를 살해한 문틈새" 로만 되어 있지만 다른 설명 없이 동일한 나무 판자에는 여섯개의 탄환을 박아 놓았다. 그는 '성 탄텐레이몬' 수도원에서 살해 되었다.

 

▲박물관 지하 감옥과 고문 도구

 

▲호반에서 시간과 고기를 낚는 늙은이(老人)들

 

▲호숫가의 어물 식당

 

▲성 니콜라우스 수도원

 

▲13세기에 건축되고 16세기에 재건된 이 작은 수도원에는 솔로몬, 아리스토텔리스, 풀루타크 등

현인들의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이 섬에는 두 개의 수도원이 더 있다.

 

▲연락선 운행 시간을 잘못 알아 정기 연락선은 끊어지고따불(double)을 제시하여 보트를 한? 수배하여 나올 수 있었다.